‘진보적 언론’의 대표주자라고들 평하는 한겨레 내부에서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미디어오늘과 기자협회보 등 보도로 파악한 사건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한겨레21이 LG그룹의 ‘화이트리스트 단체’ 자금 지원 의혹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대표이사의 편집권 침해 행위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LG 측 인사가 한겨레 사옥에 들렀다가 편집인을 만난 이후에 벌어졌다.

대표이사와 편집인 등은 편집권 침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기사 내용에 대한 의견을 표명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한겨레21 편집장도 이런 주장을 일부 인정하였으나 노조와 한겨레21 소속 기자들은 이를 부인했다. 이후 대표이사는 편집권 침해 의도는 없었으나 유감이라는 취지의 해명을 내놨고 80명에 가까운 숫자의 한겨레 소속 기자들은 공동으로 입장을 내고 편집권 침해 행위를 인정할 것과 재발방지 대책 등을 요구하고 있다.

먼저 지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관계에 대한 대표이사와 편집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편집권 침해’라는 가치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들이 문제 상황을 인식한 것은 LG 측 인사를 만난 직후이다. 편집인은 취재원의 불만을 살펴달라는 부탁 수준을 넘어 표지기사의 교체를 요구했으나 한겨레21 편집장이 받아들이지 않자 대표이사가 직접 나서 기사의 구체적인 문장과 표현 등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하달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을 편집권 침해로 어떻게 규정하지 않을 수 있는지 의문이다. 술도 마셨고 운전도 했으나 음주 운전은 아니라는 것인가?

보도를 보면 양상우 대표이사는 상황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자신이 ‘지적’을 해 일부 기자들이 ‘상처’를 받은 게 원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별 것 아닌 일인데 괜히 그런다는 뜻인가? 또 양상우 대표이사는 “저마다의 진실, 혹은 필터링된 팩트의 말들이 무수히 오갔다. 쏟아지는 ‘사실’ 가운데 일부는 제가 아는 ‘진실’과 거리가 멀었다”고 했다는데, 그렇다면 한겨레21 기자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유감 표명으로 포장돼있지만 그 안에는 ‘적극적 반론’이 들어있는 셈이다.

대표이사가 쉽게 편집권 침해 행위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은 사태를 ‘광고주 외압 굴복 사건’이 아니라 ‘함량 미달 기사 고집 사건’으로 규정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미디어오늘의 보도를 보면 대표이사와 행보를 함께 한 김종구 편집인은 문제가 된 기사와 한겨레21 기자들의 태도를 비난하기 위해 “발제만 봐도 함량이 떨어졌다”, “격의 없이 논쟁하는 게 한겨레 아름다운 전통인데 이런 식으로 나왔다”, “논리 전개, 사실 조합 등 모든 면에서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기사여서 한두 군데 손봐서 될 일은 아니었다”, “(취재기자의) 경제 기초상식을 의심하게 한다”, “박근혜 정부 화이트리스트 실상이 얼마나 쏟아졌는데 갑자기 (취재기자는) 별나라 있다가 온 것 같이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고 하니 허무하다”는 등의 매우 다양한 부정적 표현을 동원하고 있다.

김종구 편집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오히려 한겨레21이 장기간 끈기를 갖고 보도해온 박근혜 정권의 국정원과 보수단체 관련 의혹들은 최근 한겨레 유관 매체들에서 찾아보기 힘든 성과였다. 특히 문제가 된 기사는 국정원 개혁위와 적폐청산TF가 기업과 보수단체 유착 의혹에 대한 조사를 이대로 마무리 하려는 중에 나온 것이라 시의성으로 봐도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독자로서 말하자면 한겨레21의 연속된 보도 정도를 제외하면 정권이 바뀐 이후 한겨레 지면은 솔직히 심심했다. 저널리스트로서 빛나는 직관을 가진 기자들이 한꺼번에 쫓겨난 것은 아닐 테니 인사나 조직개편 등의 변화가 만든 문제로 추측할 뿐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상황은 장기간 지속되고 있다. 위의 표현대로라면 대표이사와 편집인은 날을 새워 자기 회사 신문의 모든 기사를 평가하고 ‘지적’을 하는 중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대표이사와 편집인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런 ‘지적’을 하는 순간 편집권 침해 논란이 벌어지고 미디어오늘과 기자협회보에 기사가 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대중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은 한겨레21의 특정 기사에만 굳이 끈질긴 문제제기를 하는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억울하다면 길 가는 이 중 직업이 기자라는 사람을 다 붙들고 물어보라. 한겨레 대표이사와 편집인이 했다는 일을 ‘순수한 기사의 질 제고를 위한 행위’로 보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지.

이런 판국에도 여전히 “표지 교체 등이 이뤄지지 않았으니 편집권 침해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고수한다면, 대우조선해양이 제공한 호화 요트 여행을 즐기고 그들에게 좋은 글을 써준 혐의로 잡혀간 조선일보 송희영 씨도 여전히 모범적인 저널리스트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재판정의 논리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산토리니는 산토리니고 칼럼은 칼럼이다.

한겨레21 1186호 표지

양상우 대표이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겨레를 침몰하는 배에 비유하며 권한을 적극적으로 행사하지 않는 일부 간부들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지우기도 했다는데, 무슨 얘긴지 알만하다. 또 김종구 편집인은 편집권 침해 주장에 대한 반론을 열심히 하면서 “누구의 권유에도 귀를 막고 그대로 기사를 내보내는 것이 과연 한겨레 편집권 독립의 실상인가”라고 했는데, 말 자체는 앞뒤가 맞지 않지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짐작은 할 수 있다.

요컨대 신문사도 회사인데 이슬만 먹고 살 수 있느냐는 것이겠다. 당연히 그럴 수 없다. 순도 100%의 정의감과 사명감만으로는 언론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현실을 감당하는 것조차 저널리즘의 논리 안에 있어야 하지 않는가. 경영진이 회사의 여러 어려운 사정을 편집국에 전달하고 헤아려주기를 요청하는 정도였다면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기자들 역시 회사의 부담을 덜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했을 것이다.

대표이사와 편집인이 굳이 무리한 수단까지 동원해 기자들을 찍어 누르려 한 진짜 동기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행위가 오히려 한겨레라는 매체의 ‘브랜드 파워’를 삭감한 것은 분명하다. 과거 한겨레 지면에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리를 홍보하는 정부의 정책 광고가 실리고 이에 대한 비난이 쏟아질 때, 한겨레 구성원들은 “기사와 광고는 분리돼 있다”는 논리로 회사의 입장을 방어했다. 기사가 광고주의 영향으로부터 독립돼 있으니 만큼, 적어도 광고면에서 논조가 광고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는 요지의 얘기였다. 비판할 대목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론적으로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무엇이라 항변할 것인가?

한 번 무너진 원칙은 다시 세우기 어렵다. 광고주들에게 ‘밀면 밀리는 신문’으로 비춰지지 않으려면 적어도 스스로 단호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늦게라도 한겨레가 그런 우습고 호락호락한 조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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