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정치는 몇 주째 거의 똑같은 얘기를 자기들끼리 되풀이하고 있다. 목표가 불분명한 정계개편과 오로지 남 탓만 하는 ‘정치보복’ 논란이다. 이들의 이런 지리멸렬한 현실은 문재인 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을 오히려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국민의당 내에서 안철수 대표와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은 21일 이른바 ‘끝장토론’이 예정된 의원총회를 앞두고 가칭 ‘평화개혁연대’를 만들어 세력화를 시작했다고 한다. 안철수 대표가 사실상 바른정당과의 통합을 시사하는 ‘빅텐트’를 대놓고 언급하면서 반대편에서도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일각에서는 만에 하나 분당 국면이 될 경우 이 모임이 별도의 원내교섭단체를 꾸릴 기반이 될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정치인들이 무리를 지어 스스로 좋은 이름을 짓는 모습은 이미 익숙하지만, 그렇더라도 ‘평화개혁연대’라는 이름은 의미심장하다. 과거 민주정부를 뒷받침한 세력 일반을 통틀어 표현했던 ‘민주평화개혁 세력’이란 말에서 ‘민주’만 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작명에는 두 가지 의도가 실렸을 것이다. 첫째는 안철수 대표가 추진하는 바른정당과의 통합을 보수정치로의 투항으로 규정하고, 민주정부의 후예를 자처함으로써 차별화를 하겠다는 것이다. 둘째는 더불어민주당과의 통합 및 연대를 안철수 대표 구상의 대립항으로 굳이 설정하지 않음으로써 불필요한 논란에 불을 지피지 않겠다는 것이다. 박지원, 정동영, 천정배 의원 등은 수차례 더불어민주당과의 통합에 부정적 의견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런 의도를 관철시키는 것에 성공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데, ‘평화개혁’이란 표현은 결국 ‘민주’를 덧붙일 때에야 완성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박지원 의원과 같은 사람은 안철수 대표가 하는 일을 ‘3당합당’에 비유하면서 지금 국민의당 스탠스를 유지해야 캐스팅보터로서 최대 이득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 뒤에서 이른바 일부 동교동계 인사들은 더불어민주당과의 연대 또는 복당을 공공연히 언급하고 있다.

안철수 대표와 가까운 사람들이 보기에 이들의 이런 움직임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들은 안철수 대표가 지난 대선의 패장임에도 직접 전면에 나선 것도 이른바 호남 중진들의 ‘투항’이 예상되어서라고 주장한다. 실제 안철수 대표는 바른정당을 상대로 한 구상을 “다당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바른정당과 통합하지 않으면 양당체제로 돌아간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인식 속에서 ‘평화개혁연대’로 모이는 사람들은 양당체제로의 복귀를 모색하는 철새들에 불과할 것이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오른쪽)와 바른정당 유승민 대표가 15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한국일보 주최로 열린 2017차이나포럼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한국일보/연합뉴스)

서로 명분이 그다지 서지 않는 주장을 갖고 입씨름을 벌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뒤에선 딴 얘기가 나온다. 안철수 대표가 바른정당과의 통합을 추진하는 이유는 결국 보수정치의 새로운 얼굴이 되는 시나리오로 2022년에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 아니냐는 거다. 이미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 대표는 보수층 결집으로 일순간 문재인 대통령을 추월하고도 햇볕정책에 대한 태도나 박지원 평양 대사론 등의 문제 때문에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에게 밀린 데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을 것이다(물론 이는 순전히 안철수 대표의 시각에서 본 이야기다). 지난 대선에서 드러난 약점은 털고 강점을 지키면 2022년 승리가 불가능은 아니라는 공학적 판단이다.

지금 상황에서 이런 행보는 ‘호남 포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호남 지역 여론이 문재인 정권과 더불어민주당에 호의적인데다 안철수 대표와 국민의당을 더 이상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여론조사 상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안철수 대표가 민주정부의 유산을 ‘정리’하고 영남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세력과 손을 잡을 경우 내년 지방선거 결과는 뻔할 뻔자다. 안철수 대표가 전당대회에 출마했을 때부터 국민의당 내에선 ‘탈호남’ 논란이 제기돼 온 것은 이런 상황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움직임을 명분이 아니라 정치적 이득을 중심에 놓고 설명하는 것은 안철수 대표 쪽도 마찬가지다. 더불어민주당과의 연대나 합당 모색은 결국 개별 의원들의 정치적 생명연장을 위한 행위라는 거다.

이를테면 잠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가 다시 가라앉은 연정론이다. 지난 10월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원내대표가 ‘협치의 틀’이라 표현한 무언가의 논의를 제안하였다는 보도에 대해 박지원 의원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면서 “나는 DJP연합정권 구성과 유지 파기의 경험을 가졌다”고 했다. 수사에 그치는 공개적 제안으로는 안 되고 신뢰를 담보할 수 있는 구체적 협상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취지의 얘기였지만 굳이 DJP연합을 언급한 배경을 추측하지 않을 수 없다.

DJP연합은 내각제 개헌, 실질적 권한을 가진 국무총리, 일정 수준의 선거연합 등을 고리로 성사됐다(이 중 합의가 지켜진 것은 사실상 없다). 결국 국무총리나 장관을 포함한 권력의 배분, 지방선거에서의 연합공천 등을 테이블 위에 놓자는 취지로도 이해될 수 있는 주장이다. 일상적 정국이라면 터무니없는 소리에 불과하겠으나 자유한국당이 원내 1당을 자리를 넘보고 여당의 입장에서도 의석 하나가 소중한 시기가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안철수 대표 측의 관점으로 보면 바른정당과의 통합 반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안철수 대표를 사실상 정계은퇴로 내몰고 내년 지방선거에서 광역지자체장 당선 보장이나 총리 또는 장관직을 노린 정치공학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결론이다.

아마 실체적 진실은 서로에 대한 난무하는 비난의 가운데 정도에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럼에도 정치는 결국 명분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현실정치에서 명분이란 현실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비전과 정책적 노선으로 평가된다. 국민의당에 모인 사람들은 양당체제의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 할 뿐 자신들이 무엇을 하겠다는 것에 대해선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바로 그 점이 양쪽 어디에도 긍정적 평가를 해줄 수 없게 한다.

따지고 보면 다른 야당들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정권을 탄생시켜 보수정치를 파탄으로 내몬 당사자인 자유한국당은 그렇다치더라도 ‘합리적 보수’를 하겠다는 바른정당까지 “도 넘는 적폐청산은 정치보복”이라는 주장을 반복하는 현실은 이들이 정치로 무엇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한다. 이들의 이런 태도는 현실정치에 발을 담근 주체 가운데 권력을 활용해 공공선을 위한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은 오직 청와대와 여당뿐이라는 인식의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집권세력의 편이 아니고 영원한 권력은 없으므로 현실정치에는 항상 대안이 필요하다. 그런데 야당들은 대안을 스스로 폐기하는 정치를 반복해서 선택하며 집권 가능성을 스스로 축소하고 있다. 굳이 정파적 판단을 말하지 않더라도, 이런 무원칙한 정계개편 시나리오만이 회자되는 현실은 한국 정치사의 숱한 좋지 않은 선례를 하나 더 추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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