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 대통령이 드디어 입을 연 모양이다. 12일 바레인 정부 초청으로 출국하는 자리에서 기자들과 만나 사실상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수사의 포위망에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6개월간 적폐 청산을 보면서 이것이 과연 개혁이냐, 감정풀이냐, 정치 보복이냐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결국 자유한국당 등이 꾸준히 제기해 온 ‘정치보복’ 프레임을 다시 꺼내든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군 사이버사령부의 이른바 댓글 공작 등은 일부의 개인적 일탈에 불과하며 심리전단의 증원 등은 국내 정치 개입이 아니라 북한과의 사이버 심리전 대응이란 차원에서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군 사이버사령부의 활동과 관련해 보고 받은 것이 있느냐는 질문엔 “상식에 벗어난 질문은 하지 말라”는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자신에 대한 법적 쟁점이 형성될만한 대목에서 전부 자기 책임을 부정한 것이다.

실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이번 출국을 앞두고 참모들을 불러 장시간 회의를 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여줬다고 한다. 아마도 이 회의에서 정치적으로는 ‘정치보복’을, 법적으로는 ‘무혐의’를 대응 기조로 잡은 것으로 보인다.

후자의 경우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잘못된 것이 있다면 메스로 환부를 도려내면 되는 것이지 전체를, 손발을 자르겠다고 도끼를 드는 것은 국가 안보 전체에 위태로움을 가져오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걸 볼 때 결국 ‘꼬리 자르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잘못이 있다면 모두 아랫사람들에게 책임이 있고 이명박 전 대통령 자신은 몰랐고 관여한 바 없다는 거다. 실제 지난 9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하나로 불렸던 이재오 전 의원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이명박 정권이 잘못됐다면 제가 모든 책임을 지고 감옥이라도 가겠다”고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바레인을 방문하기 위해 12일 오전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있다. (연합뉴스)

물론 이명박 전 대통령도 자기 방어를 위해 대응 논리를 만들 권리는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태도가 또 다른 정치적 법적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이명박 전 대통령의 옛 부하들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방송장악, 군과 정보기관의 국내정치 개입 등의 혐의로 이명박 전 대통령이 기소되는 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이런 사안들에 실제 관여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책임질 수 있는 일에 대해 증거를 남기지 않는 것에 익숙한 캐릭터라는 이유다.

이런 특성이 여실히 드러난 부분이 도곡동 땅과 다스 실소유주 논란이다. 도곡동 땅 문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정치 입문 시절부터 논란이 돼왔고 BBK 주가조작 사건 문제와의 연관 의혹이 제기된 이후로만 봐도 벌써 10년째 ‘뜨거운 감자’로 다뤄지고 있다. 물론 정권과 검찰 핵심부가 진실을 은폐하려 노력한 탓도 있겠지만 어쨌건 장기간에 걸쳐 벌어진 이 모든 과정에서 ‘이명박’ 석 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해놓은 것은 앞서 언급한 특유의 주도면밀함을 빼면 설명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에 비하자면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과 미르 K스포츠 재단 불법 모금은 순진한 것이거나 장난처럼 보일 정도이다.

한 나라의 지도자를 지낸 사람이 불법적 수단에 의한 통치라는 문제에서 정치 윤리가 아니라 법적 책임의 문제만을 논하는 게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정치 윤리가 없는 법적 책임 논란은 바람직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숙의가 아니라 ‘양측의 공방’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구도 속에서 정치는 기술적 공작 이상의 것이 될 수가 없다.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이 언론을 통해 일종의 ‘위협사격’을 하고 있는 것은 이런 모습의 대표격이다.

13일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이명박 전 대통령 측근들은 “현 정부의 전신인 노무현 정부 시절 적폐는 없었는지를 따진다면 우리도 할 말이 꽤 있고 노 전 대통령 수사와 관련해서도 몰라서 말을 하지 않는 게 아니다”는 등의 주장을 하고 있다. ‘혼자 죽지는 않겠다’는 식의 전형적인 태도이다. 이런 반응은 이들이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정치를 ‘공작’으로 내면화한 이들이라면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도 ‘보복’으로 생각한 게 아니겠는가.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10일 오후 대구 엑스코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 토크콘서트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정치보복’ 프레임이 한국 정치에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페이스북을 통해 ‘사카모토 료마’를 언급한 게 대표적이다. 홍준표 대표는 11일 올린 글에서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사카모토 료마도 있는데 나는 23년을 정치하고도 아직도 좌우 대결의 한축에 서서 갈 길을 헤매고 있다”고 했다. 사카모토 료마는 막부 말기 서로 대립하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이른바 ‘삿초동맹’을 성사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이 사건은 결국 막부를 중심으로 한 체제가 최종적으로 무너지는 메이지 유신의 초석이 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21세기 한국정치에서 삿초동맹을 논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일부 언론은 홍준표 대표의 이 주장이 당 내의 친박계와 친이계를 ‘정치보복’을 고리로 묶어 문재인 정권에 대항하도록 해 보수 단일전선을 형성하자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정치세력으로 본다면 21세기 한국정치의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일 것이다.

좀 더 넓게 볼 필요도 있다. 보수정치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에 대한 태도를 놓고 ‘아스팔트 우파’와 ‘합리적 보수’로 양분돼버렸다. 바른정당의 유승민 의원은 장기적으로 아스팔트 우파를 합리적 보수가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홍준표 대표는 두 지향 모두를 넓게 묶어 단일한 보수정치세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아스팔트 우파와 자칭 합리적 보수가 정치적 지향과 이해관계를 공유할 수 있는 요인이 바로 이명박 전 대통령 문제라는 거다.

현 여당에 맞서는 단일한 보수정치를 형성하려는 시도는 2022년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위력을 키워갈 것이다. 이때까지 형성될 가능성이 큰 보수정치의 꼴이 어떤 것이냐가 중요하다. 김무성 의원 등이 ‘합리적 보수’라는 깃발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자유한국당에 투항한 걸 볼 때 홍준표식 삿초동맹은 장기적으로 아스팔트 우파의 생명연장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에게 정치란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가치와 노선을 겨루는 게 아니라 내 것을 지키기 위해 남을 죽이는 ‘공작’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들이 힘을 모아 지키고자 하는 대상이 음모적 통치로 일관한 이명박 전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동시에 이런 태도는 문재인 정권을 ‘좌파정권’으로 규정하고 비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게 한다. 이념과 노선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과연 이런 정치가 바람직한 것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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