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다큐멘터리 흥행 1위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3)를 연출한 진모영 감독의 신작 <올드마린보이>의 주인공 박명호 씨는 머구리이다. 이름도 생소한 머구리가 뭐하는 일일까 싶었는데, 다이빙 헬멧을 이용해 잠수하는 재래식 잠수부를 일컫는 말이다. 산소탱크 없이 바다로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보다 더 깊은 수심의 바다에서 일하기 때문에 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극한직업 중 하나다. 오죽하면, 머구리 10명 중 5명은 포기하고 3명은 죽고 1명은 아프고, 단 1명만 살아남는다는 말이 있을까. 박명호 씨는 바로 그 살아남은 머구리 중 한 명이다.

영화 <올드마린보이> 스틸 이미지

머구리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연만으로도 충분히 다큐멘터리감이 되지만, 박명호 씨는 가족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 고통스러운 기억을 갖고 있다. 그가 온갖 위협을 무릅쓰고 북한이탈 주민이 된 것은 철준과 철훈 두 아들의 장래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명호 씨가 가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고, 그래도 남한이 그들 가족에게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하고 죽을힘을 다해 국경을 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아무 연고가 없었던 명호 씨 가족이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었고 결국 명호 씨는 자신의 몸 하나만 의지해서 깊은 바다로 뛰어드는 머구리가 되기로 결심한다.

현재 강원도 고성에서 머구리 생활을 하고 있는 박명호 씨는 머구리 중에서도 성공한 축에 속한다. 지금도 위험천만한 바다에 과감히 뛰어드는 원동력에는 가족에 대한 걱정, 사랑이 있었다. 바다에 뛰어들 때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명호 씨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다도 잠수병도 죽음도 아니요, 당장 내일 가족들이 먹을 쌀이 없어지는 것이다.

영화 <올드마린보이> 스틸 이미지

<올드마린보이>에는 박명호 씨 외에, 박명호 씨 부인인 김순희 씨와 그의 아들 철준 씨, 철훈 씨의 이야기가 비중 있게 등장한다. “잠수부의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대비해서 늘 자립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남편의 뜻에 따라 일찌감치 여러 부업에 종사해온 김순희 씨는 남편이 모는 배의 이름을 딴 ‘청진호수산’이라는 횟집을 창업한다. 대학을 포기하고 한때 아버지의 일을 도와준 바 있었던 큰아들 철준 씨는 다시 아버지의 요청에 의해 ‘청진호’의 선장이 되기로 한다. 반면, 공부를 좋아하는 막내아들 철훈 씨는 아버지가 마련해준 돈으로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난다.

박명호 씨의 가족들은 오직 가족밖에 모르는 명호 씨의 심경을 이해하면서도, 때로는 명호 씨의 독단적인 성격에 불만을 품기도 한다. 명호 씨가 유독 가족에 대한 사랑이 극진한 것은, 그가 의지할 곳이 가족밖에 없기 때문이다. 명호 씨와 함께 일했던 선장이 그만둔 직후, 명호 씨는 곧바로 아들 철준 씨를 찾았고 이어 어린 시절 탈북했던 철준 씨의 오랜 친구가 청진호에 합류한다. 뿐만 아니라 명훈 씨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북한을 탈출한 이후 잠수부에 종사하는 후배들을 부모, 형처럼 살뜰히 챙기는 면모를 보여준다. 혈혈단신 내려온 대한민국 땅에 믿을 사람은 가족, 같은 아픔을 공유한 북한이탈주민들밖에 없기에 명호 씨는 더더욱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영화 <올드마린보이> 스틸 이미지

<올드마린보이>를 지배하는 정서는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지탱해온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다. 박명호 씨는 자기가 아니면 가족들이 굶어 죽는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떠안고 사는 가장이다. 하지만 박명호 씨는 자식들이 어느 정도 성장했고 본인도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조금씩 그 짐을 내려놓고자 한다. 그래서 부인을 위해 초반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하고 횟집을 차렸고, 막내아들의 장래를 위해 엄청난 비용을 들어 어학연수까지 보냈다. 큰아들 철준 씨는 명호 씨 밑에서 일을 배우며 아버지처럼 바다 일을 하기 바란다. 그래서 명호 씨는 철준 씨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자신이 아들 철준 씨를 청진호로 끌어들었기 때문에 철준 씨가 이 일을 통해 자립하기를 바라지만 바다 일이라는 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명호 씨와 철준 씨는 종종 다투고 힘들어한다.

오직 가족을 위해 살아온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올드마린보이>는 자칫 가장, 남성 중심의 문화를 옹호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아버지의 권위를 내세우는 대신 함께 사는 부인의 의사를 존중하며(실제 박명호 씨는 북한 탈출을 감행할 당시 무려 6년간 가족과의 회의와 설득을 통해 서해바다 국경을 넘어왔다.) 자식의 꿈을 지지하고, 그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대하지 않는 명호 씨의 모습은 가부장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래서 <올드마린보이>는 ‘가족에게 바치는 아버지의 단짠 로맨스’라는 영화의 홍보문구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영화다. ‘오늘도 사선을 넘는다. 내가 아버지고, 남편이니까!’ 이 구절처럼 이 영화를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이 또 있을까. <올드마린보이>는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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