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이 시작됐다. 예상대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적 기호를 충족시키기 위해 와규 스테이크와 가스미카세키 골프장 등의 여러 ‘노력’을 보여줬다. 트럼프 대통령의 방일 일정이 시종일관 우호적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일본 현지언론은 6일 미일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의 우애를 다지는 차원을 넘어서는 정책적 성과를 전망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아베 신조 총리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직접 언급할 수 있다는 예상도 있고 대일 무역적자 해소와 관련한 전격적 입장 표명 가능성도 전망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외교안보적 차원에서 어떤 문제가 중요하게 다뤄지느냐는 거다. 언론이 예상하는 것은 아베 신조 총리가 지난해 8월 케냐에서 언급한 바 있는 ‘자유롭고 열린 인도 태평양’ 구상에 트럼프 대통령이 호응하는 모양새를 갖추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호주와 인도를 포함하는 형태로 미일 중심의 새로운 대중국포위전략이 형성되는 모양새가 된다.

일부 일본 언론은 미일정상회담에서 한반도 유사시 미국과 일본 국민의 피난 대책이 다뤄질 가능성도 전망하고 있다. 이 경우 결국 자위대가 자국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명분으로 한반도 상황에 개입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로서도 논의 과정을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다.

종합해보면 트럼프 대통령이 방한하기 직전까지 미국과 일본은 중국에 맞서 동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미국의 군사적 역할을 점진적으로 축소할 수 있는 근거를 갖추는 것에 관한 일정한 합의를 도출해내는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 일정 역시 이 과정의 일환으로 규정될 것이므로 우리로서는 협의의 폭이 상당히 좁아진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됐다.

물론 그렇더해도 여전히 북핵문제는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사안이다. 문제는 미국이 지금까지 언급해온 북핵문제의 해결책이 직접적인 군사적 대응과 중국역할론에만 국한돼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시아순방을 시작하기 전 자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공산당 19차 당대회를 통해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쥐었으므로 그동안 자제해 온 여러 요구를 공세적으로 내놓겠다는 의사를 피력한 바 있다. 여기에는 중국이 북한을 경제적으로 압박해 핵무기 개발을 중지시키거나 비핵화를 전제한 대화 테이블에 나오도록 하라는 것 역시 포함돼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생각하는 북핵문제가 근본적으로는 중국과의 무역불균형 해소와 엮여 있다는 점을 함께 봐야 한다. 북핵문제가 중국역할론으로 바로 이어지는 징검다리도 사실은 여기다. 요컨대 중국이 북한을 제어하지 못하면 무역불균형 문제에서 미국이 더 이상의 관용을 베풀 수는 없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부부가 5일 저녁 도쿄(東京)의 한 음식점에서 만찬을 앞두고 자리를 함께했다.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적 위기에 몰려있기 때문에 이번 순방에서 국내 지지층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만한 성과를 내길 원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 등이 연루된 ‘러시아 스캔들’을 수사하는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팀은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캠프에서 핵심 직책을 맡았던 폴 매너포트와 조지 파파도풀로스, 릭 게이츠 등을 기소했다. 언론의 표현에 따르자면 트럼프 대통령의 턱 밑까지 그야말로 한순간에 치고 들어온 것이다.

로버트 뮬러 특검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일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로는 공화당 주류가 여전히 트럼프 행정부에 대해 비협조적이기 때문이라는 점이 꼽힌다. 이 점은 백악관 수석전략가직을 맡았다가 재야(?)로 돌아간 스티브 배넌의 움직임에서도 확인된다. 최근 미국 일부 언론은 스티브 배넌이 공화당 주류에 의한 트럼프 대통령 탄핵을 우려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 바 있다. 미국 정치권 일부에선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을 저지하고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다음 대선 후보로 내야 한다는 주장이 여전히 회자되는 상황이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주요 지지층이 환호할 만한 성과를 내려면 무역적자 문제 해소에 한 발 더 다가간 것으로 보여야 한다. 상황을 중국으로 한정하자면 ‘무역불균형을 용인할 테니 북핵 문제를 해결하라’는 게 아니라 ‘북핵 문제는 상관하지 않을 테니 무역불균형을 시정하라’는 게 될 수 있다는 거다. 중국 입장에서도 미국과 일본이 앞서 언급한 대로 ‘핵심 이익’인 남중국해를 둘러싼 공세를 강화하는 국면에서 굳이 북한 체제를 흔들 수 있는 결단을 내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국내정치적 필요와 북한-중국-러시아 대 미국-일본의 대결구도 강화 때문에 오히려 북핵 문제가 방치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만일 미국이 비공식적으로라도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 프로세스를 진전시키기로 결심했다면 지금쯤 모종의 신호가 오가는 상황이어야 하는데 그런 기미는 없어 보인다. 허버트 맥매스터 미 NSC보좌관은 순방 직전 언론 인터뷰에서 북핵 문제 해결의 결말은 한반도 비핵화라는 점을 분명히 했고 북한은 이에 대해 비핵화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을 연일 내놓고 있다. 이 시점까지 이런 메시지들만 나온다는 것은 대화 진행이 안 되고 있다는 이야기에 가깝울 것이다.

북핵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는 어려울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역적자 등 해소 주장에 우리가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상황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주한미군 주둔의 대가로 방위비 분담금 인상과 한미FTA 재협상에서의 양보를 요구할 것이다. 단순한 구도로 보자면 한미FTA를 지키기 위해선 주한미군 철수 내지 축소를 용인할 수 있다고 하거나 방위비 분담금의 대폭 인상을 받아들여야 할텐데 둘 다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손해만 보는 결말이 예정돼 있다면 차라리 여기서는 좀 더 공세적으로 나가면 어떨까 한다. 북핵 문제 해결과 ‘돈 계산’ 문제를 연동할 수도 있지 않은가. 트럼프 행정부가 북핵 문제 해소를 위한 대화의 키를 문재인 정부에게 넘겨주도록 하고 대신 무역 문제에선 한국이 어느 정도의 양보를 하는 방안을 고려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미FTA 개악’보다는 트럼프 대통령이 말하는대로 ‘한미FTA 폐기’가 나을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제안이 현실화되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북핵과 무역을 연동하면 무역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상태로 주한미군의 축소 및 철수 고려에 포인트가 맞춰질 수 있다. 이런 상황은 북핵 유지, 중국과 일본의 군사적 영향력 확대라는 불행과 불확실성의 증대로 이어진다.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것 역시 자주국방을 통한 군사적 고도화로 이런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는 역시 한중일 3국이 무역 문제 등에서 손해를 감수하고 현재의 군사적 구도를 유지하면서 각자 소소한 이익을 챙기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이 국면에서 챙길 수 있는 실익이 사실상 없다.

이는 문재인 정권이 뭘 잘못해서라기 보다는 이미 형성돼있는 구조가 강요된 결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의 외교안보전략은 이 ‘구조’를 흔들 수 있는 종류의 과감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의 외교안보정책은 지금으로선 그러한 과감한 전략보다는 현상유지에 초점이 맞춰질 가능성이 더 커보인다. 시간은 없는데, 북핵 문제 해결의 가능성은 멀어져만 가고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