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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사이공, 불편하지만 눈물이 흐르는[하재근의 TV이야기]
하재근/문화평론가 | 승인 2010.04.20 09:58

저 유명한 <미스 사이공>을 결국 보고 말았다. 대충 설정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 보니 역시 불편한 이야기였다. 베트남 전쟁을 철저히 미국의 시각에서 그린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특히 불편한 이유는 내가 한국인이라서다. 한국은 베트남에 군대를 보냈던 나라다. 이 뮤지컬 속에서 보이는 미군들의 행태는 바로 한국군의 행태일 수도 있고, 미군이 남긴 비극의 씨앗들처럼 한국군이 남긴 씨앗들도 베트남에서 자라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이야기를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즐기기는 힘들다.

이 뮤지컬은 베트남의 한 클럽에서 시작된다. 섹시코드가 유감없이 부각되는 장면이다. <미스 사이공>의 흥행엔 이 섹시코드도 상당히 작용할 것 같다. 창녀들의 과감한 옷차림과 몸짓은 물론이고, 여주인공의 수줍은 행동과 옆이 트인 옷조차도 대단히 섹시하다.

   
 
문제는 그 섹시함을 소비하는 주체가 미군이기 때문에 관객으로서 그 미군의 시선에 몰입하기가 힘들다는 데 있다. 게다가 이 클럽의 풍경이 우리의 기지촌을 떠올리게도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우리 기지촌에서 느껴지는 것은 ‘쾌락, 환락, 즐거움’ 같은 것들이 아닌, ‘비참함, 우울함, 답답함’의 정서들이다. <미스 사이공>은 그런 ‘후진국’의 상처를 알 턱이 없는 제1세계 창작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들에게 동아시아는 신기하고 모호한 활극의 세계이며 쾌락의 대상일 뿐이다.

동시에 베트남의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한 영웅들은 악의 무리들일 뿐이며, 베트남 민중은 모두 자신들이 구원해야 할 불쌍한 백성들일 뿐이다. <미스 사이공>은 철저히 그런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엔 스님이 분신까지 해가며 미국에 저항한 베트남 사람들의 분노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모두가 미국을 숭배하는 부나비들로만 나온다. 만약 정말로 당시 베트남 민중의 정서가 그런 것이었다면 미군이 베트남에서 패전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 흐르는 정서는 실제엔 존재하지 않는, 제1세계의 환상에 불과하다.

환락에 쩔어 사는 미국의 일개 병사가 영웅으로 나오는 것과 달리, 진짜 영웅인 베트남의 전사는 주인공의 사랑을 치졸하게 방해하는 악당으로 나오는 것도 불편했다. <미스 사이공>이 세계인의 사랑을 더 넓게 받기 위해서는 이런 설정에 변화를 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예컨대 베트남 전사가 주인공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여주인공을 탈출시켜주다 총에 맞는다는 설정으로 바꾸면 아마 <미스 사이공>에 대한 찬사는 지금의 두 배로 늘어날 걸로 확신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동을 막을 순 없었다. 그런 시대적인 배경, 상황의 한계를 뛰어넘는 보편적이고 원초적인 이야기가 이 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레 미제라블>은 약자의 관점이고, <미스 사이공>은 강자의 관점이라서 정반대이지만 이 두 작품은 같은 종류의 감동을 준다. 그것은 이 두 작품 모두가 ‘인간, 사랑, 아픔’이라는 근원적인 이야기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에 <지붕 뚫고 하이킥>이나 <아이리스> 등이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이며 비극 흉내를 내는 바람에 비극의 의미가 아주 우스워진 감이 있는데, <미스 사이공>은 진짜 정석적인 비극을 보여준다. 중간 중간 눈물이 핑 돌다가 어느 순간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 순간엔 베트남전쟁, 미군 이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거대한 역사적 격동 속에 무력하게 내던져진 개개인들의 삶이 있을 뿐이었다. 이런 식의 설정이 갖는 울림은 최근 <추노>에서도 증명된 바 있다. <추노>는 세상에 매여 사는 우리 모두가 노비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극 중의 주인공들인 미군, 베트남 여인, 포주, 모두 비참한 노비들이다. 이 거대한 세상에 짓눌려 사는 우리들 각자와 같다. 그러므로 <미스 사이공>의 감동은 보편적이다. 이런 보편성이야말로 <미스 사이공>이 거둔 거대한 성공의 이유일 것이다.

명성이 자자한 음악은 당연히 그 이름값을 한다. 아름답고 처연하다. 특히 여주인공 김보경의 목소리가 캐릭터와 너무나 잘 어울린다. 그녀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살짝 설렜고, 중간에 목소리에 힘을 주며 강인한 모성애를 표현하는 대목에선 눈물이 핑 돌았다. 김성기의 능글능글한 연기도 인상적이다.

역시나 명성이 자자한 무대의 화려함도 이름값을 한다. 잠시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고 역동적으로 움직였고, 특히 전설적인 이별장면은 압도적이었다. 다만 실제 헬기를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그 아쉬움은 한국 최초라는 캐딜락 등장 장면으로 상쇄된다. 전형적인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는 듯한 장면이었다.

공연 보는 동안 옆의 사람이 눈치 못 채게 눈물을 슬쩍 닦아내느라고 나름 고충이 있었다. 끝나고 나서는 눈이 빨개져있을 것 같아서 땅을 쳐다보며 후다닥 빠져나왔다. 특별히 신나거나, 귓속을 울리는 멜로디가 남는 건 아닌데, 그 감동의 정서가 오래 남는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상태가 한 몇 시간 동안 지속됐다. 지금도 공연사진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선앤문’이 다시 듣고 싶어진다.

문화평론가, 블로그 http://ooljiana.tistory.com/를 운영하고 있다. 성룡과 퀸을 좋아했었고 영화감독을 잠시 꿈꿨었던 날라리다. 애국심이 과해서 가끔 불끈하다 욕을 바가지로 먹는 아픔이 있다.

하재근/문화평론가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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