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나라 정치는 과거 권위주의 시대와 비교하면 말할 수 없이 깨끗해졌다. 노태우 전 대통령 당시 실질적인 2인자로 부상한 법조계 출신 인사가 있었다. ‘월계수회’라는 사조직을 운영할 정도였다.

이른바 육사와 (서울)법대 출신들의 정당이라 하여 ‘육법당’이라 불리던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 시절이다. 5․18 광주민중항쟁(1988년 국회 청문회 등을 거쳐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식 명명)을 총칼로 짓밟아 수천 명의 희생자(당시 정부가 공식 발표한 사망자만 200명이 넘었음)의 피를 먹고 등장한 정권이 ‘정의사회 구현’을 기치로 내걸었던 민정당 정권이다. 후에 3당 합당을 거쳐 민주자유당(민자당), 신한국당(김영삼 대통령 시절), 그리고 지금의 한나라당으로 불리고 있는 바로 그 정당이다.

1987년 6월 민주혁명을 통해 이른바 ‘넥타이부대’를 포함한 ‘민중의 힘(people power)’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으나 ‘양 김씨(김대중, 김영삼)’의 분열로 그 해 12월 대통령선거에서 전두환의 육사 11기 동기생인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당선된다. 그리고 부인 김옥숙 여사의 인척으로 알려진 박 모씨가 실세로 급부상해 무소불위의 권세를 부릴 때 이야기다. 지금 한나라당의 강재섭 대표도 한 때 그의 수하로 활약하던 시절이 있었다.

보스의 조건

민정당 기자실에서 어느 날 몇몇 기자들 사이에 ‘사실상의 부통령’으로 불리며 차기 대권까지 넘보던 그 실세가 정치 지도자, 쉬운 말로 보스(boss)가 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 때 조선일보 출신의 모 정치인(나중에 국회의원을 지냄)이 단호하게 그가 보스가 될 수 없는 이유를 기자들에게 설명했다.

보스는 첫째 다른 사람(정치인)들이 뭔가 (인간적인) 따뜻함이나 편안한 느낌을 가질 수 있어서 기대고 싶어 하고, 둘째 돈과 자리(당직이나 관직)를 나눠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당시 기준으로 보스(혹은 지도자)의 필요(충분)조건을 말한 셈이다.

“현재 박OO 씨가 힘이 있으니 돈과 자리는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그 밑에서 편안한 느낌을 가지겠는가? 그래서 나는 그가 보스나 지도자가 결코 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3당 합당 후 김영삼 씨가 민자당 대표가 되어 박 씨와 권력투쟁을 벌일 때 강재섭 당시 의원은 ‘예상을 깨고’ 박 씨를 따르지 않고 김영삼 캠프로 들어갔다.

‘시사IN’은 삼성이 우리에게 준 소중한 ‘선물’

▲ 경향신문 11월27일자 1면.
서론이 길어졌다. 삼성그룹 법무실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의 내부고발로 요새 삼성과 이건희 회장의 불법 비자금 조성, 떡값으로 위장된 뇌물 제공, 편법변칙 경영권 세습 등이 다시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것을 보면서 15년여 전의 일이 떠올랐다.

이건희 회장과 누나 및 여동생 가족 및 친인척들이 지배, 경영하는 재벌만 5개다. 그의 형과 누나 및 여동생 가족을 포함한 친인척들이 소유 혹은 경영하고 있는 그룹들이 상법을 비롯한 법률적 측면에서는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정치적인 측면’이나 넓은 의미에서 보면 ‘방계그룹’ 혹은 ‘범 삼성그룹’ 등으로 불러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건희 회장의 삼성그룹, 큰 누나인 이인희 가족이 경영하는 한솔그룹, 큰 형인 이맹희 가족의 CJ(씨제이)그룹, 둘째 형인 이창희 가족이 한 때 소유, 경영했던 구 새한그룹, 여동생인 이명희 가족의 신세계그룹 등과 처남인 홍석현과 형제 자매들이 소유, 경영하는 중앙일보그룹 등이 있다. 필자는 이 모두를 합쳐 ‘삼성과 이건희 가벌(家閥)’로 부른다.

▲ 한겨레 11월27일자 3면.
이 여섯 개의 그룹 중 구 새한그룹을 제외한 5개 그룹 모두가 공정거래위원회가 매월 발표하는, 상호출자제한제도의 적용을 받는 기업집단군(群), 즉 재벌그룹이다.

중앙일보그룹의 경우 2006년 4월 처음으로 상호출자제한제도의 적용을 받는 59번째 기업집단군으로 선정되자 석 달 뒤인 7월 보광그룹 소속 기업들을 중앙일보그룹에서 계열분리를 신청해 공정거래위원의 승인을 받았다. 하지만 실질적인 하나의 그룹이나 마찬가지다. 김용철 변호사의 내부고발이 아니라도 이미 참여연대 등이 조사하고 또 우리가 느끼는 삼성과 이건희 가벌의 영향력은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쳐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이를 실증할 사례는 많다. 기자의 첫 기사에서 소개한 것처럼 ‘독립언론 시사IN’도 그 중의 하나다. 시사IN은 역설적으로 삼성이 우리 사회와 언론에 던져 준 귀중한 ‘선물’이다.

2006년 6월 금창태 당시 시사저널 사장(현 부회장)이 인쇄소로 넘어간 시사저널 870호에서 삼성관련 기사를 편집국장과 상의하지도 않고 삭제함으로써 기자들의 항의와 파업을 불러 온 것이 이른바 ‘시사저널 사태’다.

▲ 한겨레 11월27일자 3면.
당시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2006년 6월 22일 미디어오늘 기사 참조)에서 금창태 사장은 유독 삼성 관련 기사에 대해 그동안 유․무형의 압력을 행사해 왔다는 기자들의 비판에 대해, “이미 삼성을 떠났는데 뭐 하러 그러겠느냐. 그런 사실이 없다”고 말했다.

기사와 광고를 ‘거래’했다는 세간의 의혹어린 시선에 대해서는 “광고 때문에 기사를 뺐다는 건 언론사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언어도단’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금창태 사장이 주장했던 것처럼 문제의 이학수 부회장 관련 기사가 사실관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시사IN 기자들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금 사장은 삼성 전략기획실 관계자의 전화를 받고 기사를 읽어 보지도 않고 인쇄소에 전화를 걸어 기자들과도 협의가 끝난 것으로 이야기 하고 일방적으로 기사를 삭제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는 1965년 삼성그룹의 계열사였던 중앙일보에 기자로 입사해 2001년 사장을 끝으로 중앙일보를 떠났다. 그리고 2003년 4월 역시 중앙일보 출신인 심상기 서울문화사 회장이 인수해 경영하던 시사저널의 사장이 된다.

금창태 사장의 메모: 이명희 회장님께!

그런데 현 시사IN 기자들이 투쟁하던 당시 이상한(?) 메모지 한 장을 입수한다. 금 사장이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에게 편지를 보내기 위해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 메모지다. 전문(全文)은 이렇다:

존경하는 회장님께!

계절은 어느 사이에 또 가을로 접어들었습니다. 회장님을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나날이 성장하는 신세계그룹의 발전상을 보면서 활기찬 회장님의 리더십을 느끼고 있습니다. 지난번 상속문제를 과감하게 정면돌파로 처리하시는 것을 보고 시중에서는 이 회장님을 「스케일 큰 경영자」로 새삼 실감하면서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제까지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에서 그런 사례를 보여주지 못했기에 회장님의「결단」더욱 돋보였습니다. 그러한 좋은 평가로 회장님이 화제로 오를 때 저도 큰 기쁨을 느낍니다. 저는 회장님의 배려 덕분에 건강하게 언론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이마트의 푸드코너도 저의 가족들 생활에 큰 보탬이 되고 있습니다. 항상 회장님의 은혜에 깊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용산점의 저희 코너가 모범 점포로 선정돼 상패를 받기도 했습니다.

회장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더욱 세심히 신경쓰겠습니다.
여기에 화가 김OO 작품「진달래」1점을 보내 드립니다. 지난 번 작품보다 큰 대작입니다. 김OO 화백은「진달래 작가」로 국내외에서 꽤 유명해 졌습니다. 지난 3월 - 7월 사이에는 미국의 산디에고에서 미술전을 개최하고 진달래 작품이 소개되었습니다. 김OO 화백의 작품이 실린「산디에고 미술전」카다로그와 함께 김OO 화백의 작품세계를 소개한「월간미술」5월호를 동봉합니다.

다음기회에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회장님의 건강과 행운을 빌겠습니다.

2006년 9월 23일
금창태 드림

기자가 직접 확인한 결과, 이마트 용산역점에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음식점) 푸드코트가 있고(사업자 등록번호: 106-85-1XXXXX 대표: 이OO), 그 안에 금창태 사장의 부인(권OO)이 경영하는 ‘명가비빔밥’ 코너가 있었다. 비빔밥을 주문해 맛있게 먹고 30분 가량 지켜 본 결과 그 푸드코트 안에서 가장 손님이 많은 코너 중의 하나로 보였다. 주방 종업원만 4-5명으로 보였다. 금 사장의 부인이 직접 가게에 나오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기자는 금 사장이 실제 위 메모대로 편지를 준비했는지 또 편지를 이명희 회장에 보냈는지는 알지 못한다. 또 금 사장의 부인이 비빔밥 코너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이명희 회장으로부터 어떤 특혜를 받았는지 여부도 알지 못한다.

다만 위 메모를 보고 “과연 재벌의 오지랖이 넓기는 넓구나”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하물며 삼성그룹과 이건희 회장의 오지랖이야 오죽할까?

* 다음 기사는 "삼성의 지원을 통해서 본 중앙일보의 위장 계열분리"에 관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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