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30대 한국인 여성이 목이 잘려 죽었다는 소식은 오늘 JPnews의 '일, 왜 그녀는 살해당할 수밖에 없었나?'를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기사를 보면 이미 언론에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지독한 악플로 인해 묻히고 말았다고 합니다.

죽음도 직업과 외모가 중요한 세상이다.

일본에서 참혹하게 죽은 여성은 풍속업소에서 일하는 30대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가해자인 일본인 남성은 178cm 정도의 건장한 60대 남성이었다고 하네요. 금전적인 문제로 다투다 살해하고 머리를 잘라 유기했다고 하는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가해 남성은 유산과 장애자 보험금 등으로 풍족한 삶을 살고 있었고 항상 지갑 안에 20만 엔 정도의 현금을 가지고 다닐 정도였다니금전적인 문제만은 아니었겠지요.

이 사건은 가해자가 자수를 하고 언론에서도 외국인의 사건이기에 크게 다루지 않아 단신 보도로 끝나버린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다른 유사 토막 사건들이 일본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것과 비교해보며 무척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지요.

기사에서 언급한 일본 방송이 그녀의 죽음을 크게 다루지 않은 이유는 크게 네 가지 정도입니다.

1. 피해자가 한국인이라는 점
2. 유족들의 항의가 없었던 점
3. 용의자가 사건 보도 직후 자수한 점
4. 얼굴사진이 없는 점

여기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녀가 풍속업종 종사자라는 점 때문에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없어 언론에서도 크게 다룰 수 없었다고 합니다. 잔인한 죽음 보다는 죽은 이의 직업이 중요한 사회라는 점은 더욱 잔인하게 다가올 뿐입니다.

어차피 정부차원의 문제제기는 바랄 수도 없는 상황에서 기사를 바라보는 이들의 태도가 문제가 될 수밖에는 없어 보였습니다. 창녀이기에 죽어도 상관없다느니 외국까지 가서 몸 팔다 살해당했으니 죽어 마땅하다는 식의 표현은 우리의 어두운 면을 그대로 보여준 듯해 씁쓸할 따름입니다.

그렇다고 몸을 파는 여성을 두둔할 생각은 없습니다. 과거처럼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말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요즘 직업적 선택일 뿐인 그녀들의 선택을 애써 두둔하거나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그녀들의 죽음마저 폄하될 수는 없습니다.

외국에서 자국인이 처참하게 토막 살해당한 사건에 마치 살해자를 두둔이라도 하듯 '일본 가서 몸 파는 여자는 죽어도 싸다'는 식의 댓글들은 살인자와 별반 다름없음을 증명하는 것일 뿐입니다. 과연 몸 파는 여자들의 죽음은 그렇게 하대 받고 욕을 먹어야 하는 것일까요?

외국에 나가 있는 자국인 보호에 관해 대한민국처럼 허술한 곳은 없다고 하지요. 수많은 사례들 중 호주에서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감옥에 수십 년간 투옥되어 있는 사건이나, 최근 사이판 여행 중 총기에 맞는 사건 등에서도 알 수 있듯 외교통상부의 대처는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외국에 나가있는 대사관이나 총영사관은 자국민들의 보호가 가장 중요한 업무임에도 불구하고 자국민을 범죄자 취급하고 상대국에 대한 눈치 보기에만 급급한 외교부는 무슨 의미일까요? 국가 공무원으로서 자신의 역할도 숙지하지 못한 채 일을 하는 이들에게 자국민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어쩌면 그들에게 한국인들은 귀찮은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저 편안하게 외국에 나가 인생을 즐기고 싶은데 이런 저런 사건에 휘말리고 피해를 입은 자국인들이 늘어나는 상황이 귀찮기만 할지도 모르겠네요. 어느 나라나 자국민들이 외국에 나가 피해를 입었다면 가장 먼저 자국민 보호에 나섭니다.

하물며 자국민이 해외에서 살인을 저질러도 자국민의 인권을 우선시하고 최대한 보호를 하려는 외국의 사례들을 보면서 과연 우리의 외교부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에게 아무 말도 못하는 나라에서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 한 술 더 뜨는 것은 언론의 이중적인 태도이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도 이 사건이 크게 보도되지 못한 것 중 하나가 '얼굴 사진이 없었다는 점'과 만약 '죽은 여자가 미인'이었다면 특종이었을 것이라는 점은 언론의 상업성이 어느 정도까지 왔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앞 뒤 광고로 도배된 뉴스의 한계는 태생적인지도 모릅니다. 뉴스에도 등급은 나뉘어 있고 한정된 시간에 소비될 수 있는 사건들 역시 한정 적일 수밖에 없기에 그들이 다루는 사건들은 여러 가지 상황들을 감안해 가장 가치(?)가 있다는 사건들만이 시청자들에게 전달됩니다.

그 가치의 기준은 각각의 방송 데스크에서 기준으로 정하기에 일률적이라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방송매체는 시간적인 한계에 직면해 있다고 하지만 신문들의 경우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처럼 페이퍼 신문의 역할만이 아닌 인터넷 뉴스가 일상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재외국민들 사건에 대한 심층 보도는 충분히 다룰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서 안하는 그들에게 기사의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들에게도 창녀의 죽음은 그저 하찮은 기사일 뿐이었을까요? 그들도 죽은 창녀가 미인이었다면 애도를 했을까요? 참 씁쓸한 상황이 아닐 수 없지요.

암묵적인 사회적 카르텔이 지배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보도관제는 이젠 노골적으로 일상화되어버린 느낌입니다. 언론을 장악하고 정권의 시녀로 만들기 위해 사활을 건 정권에게, 일본에서 잔인하게 숨진 30대 초반 풍속업소 여성의 잔혹한 토막 살인은 발톱의 때만큼의 의미도 없나 봅니다.

살아서는 풍속업소 여성으로 천대 받아야만 했던 그녀는 죽음마저도 너무 잔인했습니다. 아직 버려진 머리도 찾지 못한 채 차갑게 식어버린 그녀는 자국의 네티즌들에게 마저 무참하게 손가락질을 당하는 수모까지 당해야만 했습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죽음에는 귀천이 있었나 봅니다. 강모씨라고만 밝혀진 30대 초반 한국 여성은 일본의 구석진 골목에서 머리를 짤린 채 숨지는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만약 죽음을 맞이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짧은 순간 자신의 죽음이 이런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요.

한 여성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런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인간만큼 잔인한 동물은 없다는 말들을 다시 곱씹어보게 하는 오늘이 아닐 수 없네요. 사회적인 시스템이 괴물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개인의 삶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게 되어 버렸습니다.

영화를 꿈꾸었던 어린시절의 철없는 흥겨움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힘겨움으로 다가오는지 몸소 체험하며 살아가는 dramastory2.tistory.com를 운영하는 블로거입니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재미없게 글을 쓰는 '자이미'라는 이름과는 달리 유쾌한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소통이 가능하도록 노력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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