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사회에서 다수를 미치게 만드는 이들은 누구인가? 영화는 미친 사람들을 통해 그들을 미치게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지 공포영화라는 포장 안에 잘 담아 관객들에게 던져주었습니다. 로메로 영화들이 그러했듯 공포라는 틀 속에 사회 시스템의 부조리를 파해 치던 감각이 리메이크에도 담겨있었습니다.(스포일러 주의)

어느 날 갑자기 평범하고 평화로웠던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온순했던 마을 주민이 야구장에 총을 들고 난입하고 멈추지 않는 그를 죽여야 하는 사건이 발생하지만 이는 그저 서막에 불과할 뿐입니다.

다음날엔 평범하고 인자했던 교사가 미쳐 가족들을 가두고 불을 질러 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기 까지 합니다. 이성을 잃어버린 교사는 자신의 잘못은 고사하고 점점 미쳐가는 상황에서 해법조차 찾기가 힘들어집니다. 사냥꾼 일행은 늪지에서 죽은 파일럿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며칠 전 비행기가 추락하는 듯한 커다란 굉음을 들었다는 제보를 접하고 그곳으로 향한 보안관 일행 호수 밑에 잠긴 거대한 비행기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는 분명 핵폭탄과 관련된 오염일 것이란 가설을 세우고 수도 사업국에서 호수에서 나오는 물을 가장 먼저 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가설처럼 야구장에 난입했던 남자부터 시작해 미쳐가는 사람들이 모두 오염된 물과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고는 대책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그들은 의외의 적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 적은 다름 아닌 그들을 보호해야 하는 정부군이었죠.

정부군들의 급작스러운 작전으로 모든 주민들은 한 공간으로 옮겨져 검사를 받고 나누기 시작합니다. 오염된 사람과 오염되지 않은 사람들을 열감지로 판단하는 그들에게서 당연히 오류는 나올 수밖에 없는 법. 보안관 데이빗은 자신의 부인이자 의사이며 임신한 주디를 구하기 위해 다시 죽음의 수렁 속으로 향합니다.

다들 알고 계시듯 이 영화는 공포영화의 대가 중 하나인 조지 A. 로메로의 1973년 작 <분노의 대결투>를 리메이크한 작품입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등 '리빙 데드' 3부작으로 좀비 영화의 신기원을 열었던 그의 원작을 37년 만에 새롭게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것만으로도 공포 영화 마니아들을 흥분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더욱 로메로가 직접 제작에도 참여함으로서 로메로를 추억하는 팬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작품이었습니다. 로메로의 '리빙 데드' 3부작이 인종, 권력 등의 문제를 좀비라는 존재를 통해 파해 쳤듯 이번 리메이크 작 <크레이지>는 미쳐가는 사람들을 통해 공포란 무엇이고 그 원적인 두려움은 어디에서 발현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포영화에도 세부 장르들은 무척이나 많지요. 서스펜스, 고어, 스플래터, 슬래시, 오컬트 등 뭐 사람(그 외의 것들 포함한)을 죽이는 형식에 따라 나뉘기도 하고 전체적인 분위를 따져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 세부 장르를 포함하는 공포라는 의미는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따라 무척이나 달라질 수밖에는 없습니다.

실생활에서 고어나 스플래터, 슬래시처럼 피가 튀기고 살인을 하는 것은 극소수에 국한될 뿐이지요. 우리가 느끼는 공포는 심리적인 측면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크레이지>는 우리 안에 깃든 공포를 극대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죠.

살면서 체득한 공포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회라는 조직에서 살아가야하는 우리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다름 아닌 사회를 움직이는 시스템입니다. 그런 시스템을 장악한 소수에 의해 벌어지는 끔찍한 공포는 지배라는 이름으로 뻔뻔스럽게 자행되고 있으니 말이지요.

그런 공포는 시대를 불문하고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과거 잔인한 방식의 공개 처형이 대중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는 중요한 도구였다면 현대 사회에서 공포는 바로 자본 곧 돈입니다. 돈으로 옥죄는 공포는 가장 비열하면서도 저급한 방식이 아닐 수 없지요.

대한민국의 공포 정치는 80년 봄을 기점으로 사라져간다고 생각했지만 작년 용산 참사를 겪고 두 전직 대통령의 서거를 목도하며 국민들은 심각한 심리적 공포와 그 공포가 던지는 스트레스로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대한민국은 여전히 유럽 중세의 암흑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올 해 들어서는 온갖 사회적 문제들에 대처하는 방식이 던지는 국가 권력이 가진 허술함의 공포는 공권력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몸은 자신이 지켜야만 한다는 지독한 공포심에 사로잡히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회 조직이 만들어낸 시스템의 공포는 그 어떤 공포보다도 포악하고 극단적일 수밖에 없음을 <크레이지>는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 권력자들이 만든 생화학 무기를 실은 비행기가 추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오염된 물을 마신 주민들이 미쳐가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정부는 수백 명의 마을 주민들을 몰살시켜버리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거대한 사회 시스템은 자신의 과오는 묵과한 채 자신들이 저지른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아무런 잘못도 없는 국민들을 처단하기에만 바쁩니다. 영화 속에서도 나오듯 전염이 안 된 주민들까지 몰살시킨 이유는 진실을 은폐하기 위함이었죠. 종국에는 그들이 숨기고 싶은 진실을 위해 핵폭탄으로 파괴해버리는 국가 권력은 잔인함을 넘어서는 극도의 공포심을 유발합니다. 가장 편리하면서도 효과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과오를 덮어버리는 엽기적인 방식이 가장 무서운 공포일 수밖에는 없지요.

미국에서는 핵폭탄의 위력이나 생화학 무기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과거에 실제 조그마한 마을을 골라 실험을 하는 경우들이 많았지요. 수십 년 동안 그들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실험을 하는 그들에게 국민들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사람들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그들의 논리 속에는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강자 독점의 논리 밖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저당 잡힌 논리를 피해 달아나는 주인공을 쫒아 다시 새로운 마을을 파괴하려 계획하는 권력의 모습은 <크레이지>가 정말 무서울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최고의 반전이었습니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공포는 바로 사회 시스템이 가하는 공포임을 새삼스럽게 되새기게 만드는 <크레이지>는 현재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영화를 꿈꾸었던 어린시절의 철없는 흥겨움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힘겨움으로 다가오는지 몸소 체험하며 살아가는 dramastory2.tistory.com를 운영하는 블로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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