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한 하늘이 아름다운 가을날 통영 출신의 예술 대가들을 만나는 시간을 가져본다. 통영 출신의 젊은 작가들이 전하는 윤이상, 전혁림, 김춘수, 유치환 등의 작품세계와 통영의 이야기는 어떨까. 올해 통영도서관에서 시행하는 ‘길 위의 인문학’ 강의와 탐방을 통해 통영 곳곳에 숨어있는 작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기사는 강의내용을 재구성했다. - 편집자 주

윤이상에게는 '한국이 낳은 최고의 작곡가', '현대음악의 거장', '세계적인 작곡가'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이 '세계적인 음악가'라는 명칭은 아무에게나 붙여지는 것이 아니다.

윤이상은 이미 생존시에 독일에서 출간된 '20세기의 중요 작곡가 56인'과 '유럽의 현존하는 5대 작곡가', 1995년 독일의 자아르브뤼켄 방송에 의해 20세기 100년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세계적인 음악가 100인 속 현대음악 작곡가에는 스트라빈스키와 바르톡, 그리고 윤이상 선생이 올라가 있다. 세계적인 음악가라는 수식어는 유럽과 미국의 평가에 의해 이름이 붙은 것이다. 윤이상 정도돼야 '세계적'이란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것이다.

윤이상 관련 학위 논문은 독일, 일본, 대만, 한국 등 많은 논문이 발표됐다. 한국은 1995년부터 시작했는데 국내에만 작년 기준 160편이 나와 있다. 특히 독일과 일본에는 더 많은 논문들이 있다.

윤이상의 음악세계의 위대함은 현대음악사에 큰 획을 그은 주요음 기법을 최초로 선 보인 것과 다른 하나는 이데올로기가 극심하게 대립하던 시대에 전쟁, 평화, 민주화 등의 사회참여적인 음악을 지향했다는 점이다.

이중도 윤이상기념관 팀장

윤이상은 인생자체가 상처로부터 시작됐다. 1917년에 출생한 윤이상은 통영 선비 출신의 아버지 윤기현이 본처 사이에 아들이 없자 농가 출신의 어머니 김순달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어릴 때는 외가인 산청에서 살다가 3살 무렵에 통영에 왔다. 본적에는 산청에 산 기록이 없다.

윤이상은 초등학생 때 습작으로 쓴 자신의 곡이 통영 봉래극장에서 영화 사이에 연주되는 것을 보고 13살에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어릴 때는 잘 살다가 청소년기에 가정형편이 어려워지자 선비 출신이었던 아버지가 소목장이 된다. 윤이상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아버지가 음악 하는 것을 반대해서 서울에 있는 상업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서울에 간 윤이상은 아버지를 속이고 독일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의 제자의 제자인 한 바이올린 주자로부터 화성악을 교육 받고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에서 2년간 작곡과 첼로를 배웠다.

일제의 식민지배로 흉흉했던 1944년 윤이상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가택 수색을 했는데 집에서 한글로 작곡된 악보가 나오자 항일활동 혐의로 체포돼 두 달간 옥고를 치뤘다. 이후 다시 체포될 위기에 처했을 때 죽마고우 최상환의 도움으로 죽은 사람의 신분증을 들고 도망 다니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았다.

첼로는 윤이상의 운명적 동반자다. 일제강점기 일본 경찰의 검문을 피해 도망 다닐 때도 첼로를 놓지 않았다. '활주',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첼로와 하프를 위한 2중주' 등 주옥같은 곡들을 모두 첼로로 작곡했다.

윤이상이 프랑스 유학가기 전까지 최종학력이 오사카 음악학교이다 보니 한국의 대학교에서 교수 임용에 계속 실패하게 돼 좌절을 겪는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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