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얄미운 <수상한 삼형제>의 태실장이 마침내 따귀를 맞았다. 그것도 도우미가 지켜보는 앞에서 현찰에게 맞았다. 이보다 통쾌할 순 없다.

그동안 시청자는 계속 당하기만 했던 도우미에게 감정을 이입하면서 울화를 쌓아왔고, 현찰의 우유부단함에 짜증을 축적해왔기 때문이다. 도우미 앞에서 현찰이 태실장을 응징하는 것은 도우미의 속을 풀어주는 일이고, 그에 따라 시청자의 속을 풀어주는 일이 된다.

그러자 바로 다음날 이런 기사가 나왔다.

‘수삼’ 훈훈함+통쾌함 호평 ‘드디어 막장 행 멈추나’

지금까지 짜증나서 막장이었는데 이제 통쾌하게 짜증을 풀어주니까 막장드라마가 아니란다. 과연 그럴
까? 짜증나면 막장이고, 통쾌하면 훈훈한 드라마인가?


- 통쾌한 것까지 막장이다 -

막장드라마는 상황과 캐릭터를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드라마다. 워낙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에 매 순간 화제가 되고, 시청자는 욕하면서 보게 된다.

대체로 막장드라마는 초반에 주인공이 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시청자의 안타까움과 울화가 극에 달한다. 어떻게 저렇게 악독한 시어머니가 있을 수 있지? 어떻게 저런 남편이 있을 수 있지? 등등의 탄식이 장안을 휘감는다.

그러다 반전이 시작된다. 주인공을 괴롭히던 나쁜 캐릭터는 처절하게 응징 당한다. <아내의 유혹>에서 남편은 ‘개고생’을 했고, <조강지처 클럽>에서도 못된 남편과 불륜녀는 극단적인 응징을 당했다. 이러면 통쾌하다는 찬탄이 또 장안을 들끓는다.
짜증나고 답답한 것에서부터, 통쾌하고 후련한 것까지가 모두 ‘막장 풀세트’인 것이다. 막장드라마는 워낙 극단적이고 독한 설정을 보여주기 때문에 시청자를 심하게 짜증나게 하고, 그에 따라 나쁜 역이 응징당할 때의 통쾌함도 크게 마련이다. 그 통쾌함이 크다고 ‘이제는 막장이 아니다’라고 하면 우스운 꼴이 된다.


- 따귀 때렸다고 찬양하나 -

막장드라마는 뭐든지 극단적으로 표현하는데, 현찰이 태실장의 따귀를 때리는 것도 막장스러웠다. 여태까지 태실장만을 감싸던 현찰이 문득 정신을 차리고 거리를 두는 것까지는 말이 되지만, 갑자기 따귀는 왜 때리나? 도우미의 말만 듣고 태실장의 따귀를 때린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설정이었다. 막장드라마이니까, 뭐든지 극단적으로 표현하니까, 반전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막장드라마는 주인공의 극단적인 변신과 극단적인 복수, 극단적인 성공 등을 담는다. <조강지처 클럽>에서 지지리 궁상이었던 여주인공은 갑자기 화려한 커리어 우먼으로 변신해 전 남편을 비웃었다. <아내의 유혹>에서는 점 하나 찍고 최고의 매력녀로 변신했다.

이것은 막장드라마의 주시청자인 주부들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내가 비록 지금은 구박받지만 언젠가는 화려하게 변신해 모두를 비웃어 주리라’ 혹은 ‘얄미운 시어머니와 남편과 불륜녀를 짓밟아 주리라’라는 1차원적인 욕망 말이다.

그렇게 주인공의 꿈이 이루어질 때, 대체로 주인공은 당하기만 했던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극은 권선징악의 모양새를 갖추게 된다. 그걸 보고 통쾌해하며 ‘보아라! 이 드라마는 원래 훈훈하고 따뜻한 작품이었다’라고 찬양한다면, 영원히 똑같은 패턴에 당하게 될 것이다.

막장드라마를 위한 변명이 너무 많다. <아내의 유혹>이 한창일 땐 워낙 재미있으므로 고품격 드라마라는 기사들이 나오기도 했다. 얼마 전엔 <수상한 삼형제>의 시청률이 높으므로 막장드라마가 아니라는 이상한 말도 나왔다. 이번엔 나쁜 사람의 따귀를 때렸으므로 막장이 아니라고 한다.

이렇게 갖은 이유로 막장드라마를 옹호하다보면 우린 막장의 홍수에 떠내려가 버릴 지도 모른다. <막장드라마>는 노골적이고 극단적이고 단순한 표현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면 된 것이다. 이미 시장에서 충분히 이익을 얻고 있기 때문에, 굳이 찬사까지 해줄 필요는 없다.

문화평론가, 블로그 http://ooljiana.tistory.com/를 운영하고 있다. 성룡과 퀸을 좋아했었고 영화감독을 잠시 꿈꿨었던 날라리다. 애국심이 과해서 가끔 불끈하다 욕을 바가지로 먹는 아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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