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 처리 문제가 정국의 ‘핵’이 되고 있다. 국회는 18일 인사청문특위에서 김명수 후보자 임명동의안 심사경과보고서 채택을 논의할 예정이지만 아직도 갈 길은 첩첩산중이다.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은 김명수 후보자 임명 문제에 명확한 반대 입장을 내놓고 있다. 이념적으로 편향적인 인물을 정권의 ‘코드’에 맞춰 임명하려 한다는 게 비판의 근거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또 다시 국민의당이 키를 쥐고 캐스팅보터의 역할을 하게 될 수밖에 없다. 국민의당 내부 여론은 한쪽으로 정리되는 분위기는 아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언론은 국민의당 내에서 안철수 대표를 따르는 의원들과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중진 의원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는 취지로 보도하고 있다. 안철수계 쪽이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낙마 이후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까지 낙마시켜 존재감을 보여줘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면 호남의 중진들 사이에선 두 번 연속 무리한 결정을 하는 것은 어렵다는 기류가 강하다는 것이다.

국민의당 일부 중진들은 김명수 후보자 임명동의안 처리 문제에 대해 스스로는 ‘협조’ 의사를 밝히면서도 대통령과 여당이 일정한 명분을 줘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박지원 의원의 경우 페이스북을 통해 “대통령님과 사법개혁의 성공을 위해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서 야당 대표들과 관계자들에 대한 전화와 면담을 통해 협력을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언론 보도에 의하면 박지원 의원 등은 김이수 후보자 낙마로 청와대와 여당이 국민의당과 강하게 각을 세운 상태에서 김명수 후보자 임명동의안 처리 일정이 강행되면 부결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내세운 것으로도 알려졌다. 일종의 사전정지작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런 주장에 일리가 없지 않다. 그래서인지 김이수 후보자 낙마를 두고 국민의당을 강하게 비판했던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은 김 빼기에 들어갔다. 문재인 대통령은 17일 “그동안 국회와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노력했지만 부족했던 것 같아 발걸음이 더 무겁다”며 “인준 권한을 가진 국회가 사정을 두루 살펴 사법수장 공백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해 주시기 바란다”는 메시지를 내놨다. 그간 야당이 제기한 ‘소통 부족’의 비판을 인정하면서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문제를 ‘사법부 공백’이란 프레임으로 전환하려 시도한 것이다. 즉, 문재인 대통령의 메시지는 일종의 ‘명분론’을 겨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념 편향’과 ‘코드인사’라는 반대 명분을 상쇄하겠다는 얘기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15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음 문제는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와 우원식 원내대표가 사과를 할 것인지 여부다. 국민의당이 문제 삼고 있는 표현은 ‘땡깡’과 ‘적폐연대’라는 부분이다. 김이수 후보자 낙마는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이 주도한 것이고 자신들은 자유투표라는 최소한의 성의를 보였는데 국민의당을 이런 식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더불어민주당은 추미애 대표의 사과를 포함한 다양한 해결 방안을 유연하게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일부에서는 안철수 대표와 직접 회동을 통해 ‘담판’을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고 한다.

국민의당이 여당 지도부의 특정 표현을 국가의 중대사와 결부시키는 것에 어떤 큰 명분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여전히 여당이 전향적인 정치적 판단을 해야 할 필요는 남아있다. 첫째는 김명수 후보자 임명동의안 처리가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다. 김명수 후보자까지 낙마하면 국회는 당분간 ‘파국’으로 향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야당이 자신들의 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사검증 실패론을 다시 꺼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쏘려는 화살은 구체적으로는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을 겨냥하고 있다. 조국 민정수석은 검찰개혁의 방향을 설계하고 이를 추진할 막중한 임무를 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주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 박성진 중소기업벤처부 장관 후보자 자진 사퇴를 계기로 대국민 사과를 한 것은 인사검증 실패론에 불이 옮겨 붙는 상황을 일단 차단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김명수 후보자 낙마가 현실이 될 경우엔 일단 꺼진 불은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런 상황이 조성되는 건 여러모로 좋지 않다.

둘째는 국민의당이 필요로 하는 명분을 충분히 주지 않은 상태에서 김명수 후보자 낙마라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날 경우 역설적으로 국민의당이 보수정당을 중심으로 한 정계개편론에 휩쓸려 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거다. 중앙일보 16일자 지면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 자유한국당 정진석 의원은 “정책빅텐트가 만약 야3당 대통합으로 연결될 수만 있다면 대사건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 “그리 되면 영호남이 손잡고 한 지붕 아래 정치결사를 이루는 첫 실험이 성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진석 의원은 바른정당 김무성 의원 등과 함께 지난달 ‘열린 토론, 미래’를 출범시켰다. 여기에는 국민의당 소속 일부 의원들도 참여하고 있다.

안철수 대표의 전당대회 출마 당시 바른정당과의 연대론이 불거져 나왔다는 점까지 고려해보면 김명수 후보자 낙마 이후 야3당의 결속이 급속도로 강화되는 국면을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다. 더불어민주당이 국민의당을 향해 ‘땡깡’, ‘적폐연대’ 등의 언어로 공격하는 건 이런 상황을 오히려 가속화시킬 수 있다. 이런 발언의 문제는 그저 막말이라는 것보다는 “국민의당이 사법부 무력화로 존재감을 확보한 후 자유한국당, 바른정당과의 정치적 연대에 나서려는 것”이라는 정치적 전제를 깔고 있다는 것에 있다.

이렇게 보면 국민의당 내에서 더불어민주당에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에는 일종의 ‘구조 신호’가 섞여있을 수도 있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보수정당을 중심으로 한 정계개편론에 편승하는 그림이 그려지면 국민의당은 ‘탈호남’이란 문제에 직면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렇잖아도 김이수 후보자 낙마 이후 호남 지역의 국민의당에 대한 여론은 악화되고 있다. ‘호남홀대론’을 주장하더니 정작 호남 출신 헌법재판소장의 탄생을 별다른 명분도 없이 반대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탈호남’은 보수정당 중심의 정계개편론으로의 원심력을 강화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될 것이다.

이런 점들을 종합하면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정치적 유연성을 발휘해 사과를 하고, 국민의당이 지난주부터 이어진 청와대의 행보까지 고려해 김명수 후보자 임명동의안을 처리해 ‘합리적 중도정당’이란 자기평가를 회복하는 게 현재로서는 명분과 현실 양쪽 모두에서 가장 좋은 그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상황은 현재의 5당체제가 앞으로도 유지되는 쪽으로 힘이 실리게 할 것이기 때문에 여야 양쪽에 포진해있는 정계개편론자들의 입장에선 불만족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물론 현재 한국 정치의 난맥상을 돌파하기 위한 정계개편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과연 그게 무엇을 위한 정계개편이냐는 점이다. 당리당략이 아니라 이념과 노선에 따른 정당의 분립이란 차원에서 판단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적어도 김명수 후보자 문제를 정략과 연동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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