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권의 사례에 이어 이명박 정권에서 국정원이 했다는, 그야말로 우습지도 않은 공작 이야기를 보니 자신감이 생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그저 하는 것으로도 국정원 요원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국정원과 검찰 등에 따르면, 이명박 정권의 국정원 요원들은 영화배우 문성근 씨와 김여진 씨의 얼굴을 부둥켜안고 있는 남녀의 알몸 사진에 합성해 보수적 네티즌들이 이용하는 카페 게시판에 올렸다고 한다. 이들은 거사 전 비장한 어투로 보고서를 작성해 상부에 올리기도 했다. “사이버전 수행 역량을 활용해 특수 공작에 나서겠다”는 것인데, 이 정도 합성 사진이 ‘특수 공작’으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국정원이 말하는 ‘사이버전 수행 역량’의 문턱이라는 게 얼마나 낮은지 실감할 수 있다.

국정원이 이 ‘특수 공작’을 감행한 것은 지난 2011년 11월이다. 이 시기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주민투표 결과를 사퇴와 연계한 희대의 정치적 자살골을 넣은 지 3개월 정도가 지난 때이다. 2010년 지방선거에 이어 보수정치 세력으로서는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들이 특히 위협적으로 생각한 것은 ‘인터넷 여론’이었을 것이다.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의 영향력이 급증하면서 이른바 ‘소셜테이너’로 불린 인물들의 발언력 또한 정점에 다다른 때였다. 문성근 씨와 김여진 씨는 ‘소셜테이너’의 대표격 인물로 여겨졌다. 논리로 이기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이니 이미지 훼손을 해보자는 심산이었겠지만, 원래부터 ‘소셜테이너’들에 거부감을 가진 이들이 환호했다는 걸 제외하면 목표를 이뤘는지는 의문이다. 국정원이 이 ‘특수 공작’의 파괴력을 정말로 신뢰했던 것인지 진실이 궁금하다.

배우 문성근이 지난 4월 영화 석조저택 살인사건 제작발표회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무서운 것은 이 조악한 선전물이 ‘시행착오’의 결과물일 수 있다는 거다. 실제로 보수세력은 이후 2012년 대선에서 국정원 요원을 동원해 커뮤니티 게시판에 조직적 댓글을 달고 이른바 ‘십알단’을 양성하도록 하는 등 한 발짝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2008년 국정원 내의 ‘알파팀’이란 이름의 소박한 규모로 시작된 민간인을 동원한 여론조작은 2012년에 되면 30개 팀 3500여명 규모에 이를 정도로 커졌다는 게 한겨레 등의 보도 내용이다.

국정원이 밝힌 바에 따르면 박근혜 정권처럼 이명박 정권도 ‘연예인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활용했다. 이 리스트에 포함된 연예인들은 방송을 중심으로 한 연예 활동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한겨레21의 보도에 의하면 보수정권의 국정원은 영화인들에 접근해 재정적 지원을 근거로 ‘국뽕영화’를 만들 것을 종용하는 ‘엔터팀’이란 조직도 운영했다고 한다. 민주주의 헌법을 갖고 있는 나라에서 상상을 뛰어넘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진 것이다.

만일 권력이 인터넷 상의 편향적 여론이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또는 문화예술 작품의 성향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면 통치를 잘해서 사회의 지배적 믿음을 바꾸도록 하면 그만이다. 보수정치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면 문화예술분야도 그들의 신념에 맞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기울어질 것이다. 그런데 보수정치는 이런 일반론 같은 것은 시원하게 벗어 던져 버렸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인가?

국정원은 정보기관이라는 특성상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그래서 국정원 권력의 활용은 법으로 엄격히 제한된다. 그런데 보수정권은 이러한 민주주의의 법과 원칙 같은 것을 전혀 존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보수정치가 생각할 때 이런 거추장스러울 뿐인 번지르르한 외관의 규칙들은 비효율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법대로 하면 도대체 어느 천 년에 문화예술계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을 수 있겠는가! 하루 빨리 ‘비정상의 정상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초법적 수단을 동원하는 걸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이런 태도는 박정희 소장이 1961년 쿠데타를 일으킬 때도 보여준 바 있다. 쿠데타의 기본 논리는 이 사회의 혼란이 기성의 수단으로는 바로잡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상태이므로, 자신을 비롯한 개혁을 꿈꾸는 일부 군 세력이 불법을 감수하고서라도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형식의 논리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곳곳에서 매우 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예를 들면 세월호 참사는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가. 세월호 참사는 법과 원칙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이윤을 효율적으로 추구할 수 없으므로 다소 간의 불법과 탈법을 묵인해야 한다는 믿음이 힘을 발휘한 결과이다. 이는 앞서 5.16 쿠데타에서 본 논리가 자본주의적 질서에 따라 변주된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연합뉴스)

물론 이명박 정권의 국정원처럼 치졸한 형태로 불법을 행할 때에는 여기에 더한 ‘핑계’가 필요하다. 이 때 동원되는 것이 ‘불순한 의도를 가진 상대’의 존재이다. 현실에서 이 개념은 북한으로 구체화 된다. 북한을 추종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숨기고 법과 원칙을 악용하고 있다는 거다. 따라서 이들에 대응하려면 더더욱 초법적인 수단이 필요하다.

앞서 이명박 정권의 국정원이 만든 조악한 합성사진에는 ‘공화국 인민배우 문성근 김여진 주연, 육체관계’라는 글귀가 함께 적혀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공화국 인민배우’란 단지 욕설이 아니라 이러한 ‘불순한 의도’의 존재를 시사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문성근 씨와 김여진 씨가 겉으로는 정의를 외치면서 속마음으로는 북한을 추종하려는 목적으로 ‘소셜테이너’를 자처하고 있다는 거다. 따지고 보면 보수정권은 ‘좌파청소’를 내걸고 때만 되면 ‘종북’을 말하며 각계의 인사들을 탄압해왔는데, 마찬가지의 맥락이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문재인 정권은 ‘적폐청산’을 내걸고 있는데, 보수정권이 자행한 이런 일들이야 말로 ‘적폐’의 1순위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은 일부라도 법의 심판대에 올라와 있지만 이명박 정권의 국정원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철저한 수사와 이를 위한 조치들이 필요하다. 보수언론은 이를 ‘전 정권에 대한 보복’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로 ‘불순한 의도’를 전제하는 물타기일 뿐이다.

그런데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적폐를 청산하는 것은 단지 이명박 전 대통령과 그의 일파들을 처벌하는 것에서 끝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서 우리들 스스로의 각성도 필요하다. 당장의 효율성을 추구하기 위해 원칙을 우회하거나 무력화시키는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회 그 자체를 바꿔야 한다. 멀고 힘든 길이 되겠지만 이를 포기하지 말아야 ‘적폐청산’이 완성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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