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게 등장해 퓨전 사극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추노>도 단 한 회만을 남겨 두었습니다. 초반의 폭풍 같은 즐거움이 중반을 넘어서며 힘겨움으로 다가왔지만, 처음부터 이룰 수 없는 꿈을 쫓아왔던 그들은 마지막 결전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초상인 업복이와 초복이

죽기위해 시작한 드라마처럼 수없이 등장하던 인물들이 지속적으로 죽어나가는 장면들만 바라봐야 했던 시청자들에게 지난 시간들은 그리 유쾌하지 많은 않았습니다. 작가는 전쟁하면 수천 명도 죽는데 그 정도가 많지는 않다고 했지만 적절한 비유는 아니었지요.

시청자들과 호흡을 하던 캐릭터의 죽음과 전쟁을 통해 단시간에 수없이 죽어나간 인물들(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여 지는)과 비교를 하는 것은 단순한 양적인 재단일 수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감정이입이 되어가던 인물의 죽음은 극을 따라 함께 호흡하던 시청자들에게는 힘겨움일 수밖에는 없었으니 말이죠.

10여 년을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을 찾기 위해 스스로 추노 꾼이 된 양반. 노비에서 양반이 되어서도 죽은(줄 알았던) 정인을 잊지 못하고 살아가던 여인. 대의를 위해 관노가 되어 살아가던 강직한 무장. 그들은 지독한 운명이 만들어낸 안타까운 사랑의 희생양이었습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들의 사랑은 언제나 엇갈리기만 하고 사랑을 찾았다고 느낄 때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있는 여인을 접해야 하는 남자의 허망함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겁니다. 그런 지난한 시간동안 찾아왔던 사랑을 '근원적인 사랑'의 의미로 바꿔가며 운명의 장난으로 떠나간 여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대길은 흉내 내기 힘든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작가도 밝히고 처음부터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추노>는 사랑이야기였습니다. 비록 과정 속에 드러나는 가치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특별한 그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람들은 있었지만 역사가 증명하듯,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백일몽을 꾸던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사랑'이라는 가치에 대한 이야기뿐이었습니다.

신분을 철폐하고 노비도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업복이와 동료들의 바람은 그저 허튼 바람일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분의 등장은 이미 등장부터 노비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기 위한 수단임을 누구나 알 수 있었고, 단지 정점이 어느 시점이냐 만이 문제였을 뿐이었으니 말이죠.

그렇게 23회가 되어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그분의 잔인한 돌변은 이상향을 향해 행복한 반란을 꿈꾸던 그들에게 절망만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룰 수 없는 꿈인 줄 알면서도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끝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대한 답답함 때문이겠지요.

과거에도 그러했지만 현재에도 순수한 열정으로 긍정적인 사회 변혁을 꿈꾸는 다수를 농락하고 희롱하는 권력자들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역사는 돌고 돈다는 진리가 정답일 수밖에 없음을 <추노>는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절대 사라지지 않는 사회적 굴레 속에서 점점 가속화되어가는 사회적 차별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새로운 신분제도인 '재력과 권력'은 스스로 상하를 구분하고 그들은 넘치는 권력과 재력으로 21세기 양반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습니다.

소수의 양반과 다수의 노비가 되어가는 현대 사회는 어쩌면 우리가 매주 바라보던 <추노>속 인조시절보다도 더욱 힘겨운 현실일지도 모릅니다. 돈의 노예가 되어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상하 구분은 과거의 양반과 노비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습이 조금 바뀌었다고 근본이 바뀔 수 없듯 과거에도 청산하지 못했던 사회적 지배 시스템이 갑자기 바뀔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세계사 속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수많은 혁명들도 종국에는 돈의 지배를 받게 되는 모습들을 볼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어쩌면 희망은 더욱 힘겹기만 합니다.

팔려간 초복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주인을 죽이고 그녀를 구해내는 업복이는 노비들의 희망봉인 짝귀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합니다. 쉽게 헤어질 수 없는 그들은 이 순간이 마지막을 수도 있음을 감지합니다. "그저 어딘가에 숨어 둘이 잘살까"라는 업복이의 질문에 "그럴 수 없다며 싸워야한다"는 초복이는 슬프기만 합니다.

둘의 행복함보다는 모두의 행복을 위해 헤어져야만 하는 그들은 <추노>에서 보여준 그 어떤 장면보다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해냅니다. 사지로 떠나는 남자와 그런 남자를 자신의 욕심으로 잡을 수 없는 여자는 오열을 하며 입을 맞춥니다.

그들의 키스가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허세 없는 순수한 열정이 만들어낸 아픈 이별이기 때문이겠죠. 사랑하기에 사랑을 위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들의 모습은 그래서 더욱 큰 비애를 느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추노>에서 업복이와 초복이의 이 장면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아쉬웠을 듯합니다.

그 어떤 희망도 사랑도 찾아보기 힘든 드라마에서 비록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을 막연한 도피가 아닌, 마지막 도전으로 삼으려는 업복이와 초복이의 모습은 아름다웠습니다. 누군가 설파하던 염세적인 현실도피가 아닌 비록 계란으로 바위를 치더라도 자신들의 이상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큰 울림으로 다가오기 때문이었습니다.

<추노>도 처음부터 비극일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양반과 노비의 사랑. 바뀔 수없는 현실을 바꾸고자 노력하는 이들의 몸부림. 이 모든 게 이룰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자신들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오열하며 나누던 업복이와 초복이의 입맞춤은 절망이 아닌 희망일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어설픈 감정의 소비와 비관으로 일관하는 나르시즘이 아닌 작은 물들이 모여 커다란 강물이 될 수 있음을 외치는 업복이의 마지막 장면은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영원한 도전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 어떤 인물들보다 특별하고 의미 있었던 업복이와 초복이의 마지막 입맞춤은 <추노>를 오랜 시간 기억하게 만드는 명장면이었습니다.

노비가 강하게 새겨진 그들의 모습은 '노와 비'가 하나가 되어 개인의 문제가 사회의 제도가 되어 지듯, 단순히 개인의 사랑놀이가 아닌 힘겨운 삶을 살아야만 했던 그들의 희망을 위한 마지막이기에 더욱 격정적이었습니다.

하루하루가 힘겨운 서민들에게 세상은 쉬운 게 아니라는 궤변만 늘어놓으며 어설프게 가르치려한 누군가와는 달리, 같은 죽음이라도 힘겨운 삶에 허튼 희망이더라도 꿈꾸며 바꿔나가려는 노력을 하게 하는 업복이와 초복이의 모습은 <추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가치였습니다.

영화를 꿈꾸었던 어린시절의 철없는 흥겨움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힘겨움으로 다가오는지 몸소 체험하며 살아가는 dramastory2.tistory.com를 운영하는 블로거입니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재미없게 글을 쓰는 '자이미'라는 이름과는 달리 유쾌한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소통이 가능하도록 노력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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