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복과 초복. 추노의 배경에서 살아있는 주제로 몸을 키워온 진짜 노비 이 둘은 짧은 입맞춤으로 다시 만날 기약 없는 이별을 맞았다. 대길과 언년 그리고 태하와 언년의 키스보다 헐겁고 서툰 입맞춤이었지만 죽음처럼 어두운 그들의 삶의 마지막 빛이었고, 단 한 번의 따스함이었다. 사탕키스, 엽전키스처럼 연애의 발랄한 추억으로 여길 수 없는 절망과 고통의 키스였다.

비로소 이들의 얼굴에 새겨진 노(奴)와 비(婢)가 왜 다른 방향이었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입맞춤하기 위해 얼굴을 맞대니 노비란 단어가 이어지는 이 기구한 남녀의 모습에 차라리 눈을 돌리고 싶을 정도로 가슴 아픈 장면이었다. 절망의 끝에서 나눈 그 한 번의 키스에 더욱 강조된 노비의 낙인은 잊지 못할 비극의 기억이 될 것이다.

초복에 대한 업복의 사랑은 무심한 바람처럼 지금까지 아는 듯 모르는 듯 숨겨져 왔으나, 시집갔다는 말 한 마디에 양반주인을 낫으로 베어 죽일 만큼의 분노로 드러났다. 지금까지는 그분(박기웅)의 지시에 따른 살인이었다면 이것만큼은 업복의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감춰왔던 사랑도 분노와 함께 드러났다. 그리고는 한밤중에 초복을 찾아 남의 집 담장을 넘었고, 의지는 있어도 행동하지 못했던 초복을 불러냈다.

선혜청을 공격할 때에는 같은 노비였던 강아지에게 총을 겨누기가 그토록 어려웠지만 초복을 구하러 가서는 서슴없이 화승총에 불을 당겼다. 업복은 그동안 노비당원으로서도, 초복을 사랑하는 데에도 소심한 모습을 보였다. 양반들 저격에도 그가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공적을 세웠다. 그럼에도 일을 마친 후에 의문을 갖는 등 노비당의 주체면서도 스스로 주변인으로 한발 물러서는 소극성도 보였다.

사랑 때문에 아니 사랑을 잃을 것 같은 절망으로 인해 소심하고, 소극적이었던 업복이를 주체적으로 결단하고 행동하는 자아를 발견하게 됐다. 업복이가 주제적 측면에서 추노의 주인공이라는 진단은 그래서 옳았다. 초복이를 구해낸 업복이는 숲 속으로 가서 월악산으로 가라고 이른다. 거기서 이들이 나눈 길지 않은 대화는 어떤 혁명 전야의 명대사보다도 절절하다.

업복 : 우리 그냥 가서 둘이 살까? 내는 사냥하고 니는 농사짓고, 호랑이 잡아 큰 값에 팔아서 꽃놀이도 가고, 그냥 그렇게 살까? 그렇게 살기 바라나? 우리끼리...
초복 : 아니요 그럼 세상은 누가 바꿔요 가서 싸워야죠.

역시 초복은 노비당의 잔다르크라 해도 좋을 만큼 의식이 투철한 처자였다. 빈말이라도 업복을 붙잡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싸워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언년과 설화 모두 실패한 케릭터지만 초복만은 겨우 건질 수 있는 초지일관의 케릭터였고, 끝까지 개념찬 노비로서 끝을 장식해주었다.

그리고 업복과 초복은 설움에 떨며 처음이자 마지막 입맞춤을 나눈다. 나중에 월악산에 간다고는 했지만, 말을 하는 업복이나 초복이 둘 모두 그 말대로 될 거라 믿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삶을 단념한 짙은 키스를 하는 때 노비당은 좌의정의 끄나풀이었던 '그분'이 정체를 드러내며 살해된다.

선혜청 습격만으로 민란의 조짐이라는 좌의정의 주장을 인정하지 못하는 인조를 설득하기 위해 노비당이 장례원(노비 관련 서류와 소송을 담당하던 기관)을 습격하는 상황을 만들어 함정에 빠뜨린다. 반란을 하기에는 참 지독히도 무지하고 순진했던 업복의 친구 끝동 등 노비당은 단 한 번의 승리만을 기억한 채 이승의 기억을 접어야 했다. 대신 그 한 많은 생의 마지막까지도 배신을 안고 가야 했다. 참 서러운 것이 노비 팔자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추노는 기나긴 장정을 마칠 단 한 편의 방송분만 남겨두고 있다. 더러는 대길의 생사여부로 결말을 예상하지만 추노의 여정은 23회에 모두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추노는 예상한 것처럼 새드엔딩으로 치닫고 있다. 대길이 죽건 살건, 태하가 언년과 함께 청으로 가건 못가건 상관없이 노비들의 삶에 단 한 줄기 빛도 남지 않은 노비당의 몰살은 추노의 결말이다. 정리하자면 절망이다.

그러나 어떤 절망이 곧 패배라고는 할 수 없다. 사람들을 광장으로 불러내는 것, 사람들의 가슴 속에 광장을 담게 하는 것에는 적잖이 절망의 역할이 크다. 우금치의 절망이 다시 애오개로 이어지고, 애오개의 좌절이 또 다시 4.19로 이어지듯이 역사의 수레바퀴는 절망과 분노가 한 축을 담당했다. 추노가 말해온 절망이 패배라고 하고 싶지 않은 이유이다.

추노는 역사나 시대를 구원하지 않았고, 그럴 힘도 없다. 추노가 한성별곡에 이어 또 다시 절망의 서사시 한 편에 담고자 했던 것은 업복의 변화일 거라 믿고 싶다. 마지막 끝동의 분노 역시도. 결국 추노의 주제는 절망과 분노, 그것이 아닐까?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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