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이 주는 힘은 허구가 지배하는 창작영역에서 더욱 크게 작동한다. 그래서 실화 영화는 관객에게 주는 감동의 완력이 있다. 물론 실화라고 해서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택시운전사>와 거의 동시에 개봉했던 <군함도>는 허구가 사실을 견뎌내지 못한 경우에 속한다. 반면 <택시운전사>는 허구와 사실 사이의 샛길을 교묘히 오가며 관객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었다.

그럼에도 갖는 유일한 아쉬움은 김사복 씨의 존재였다. 실제 인물인 것은 사실인데 그 실제를 확인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상실감 비슷한 감정일지 모른다. 김사복 씨의 행방을 모르고는 왠지 이 영화는 결말이 없다는 생각도 들기도 했다. 그런데 마침내 김사복 씨를 찾을 수 있었다.

영화를 본 김사복 씨 아들이 스스로 세상에 알린 것이다. 처음에는 의심도 많았지만 아들이 갖고 있는 김사복과 위르겐 힌츠페터의 사진은 결정적 증거였다. 그렇게 대부분이 몰랐던 김사복 씨는 영화 <택시운전사>로 우리에게 오더니 결국에는 실제 인물로 다시 찾아오게 됐다.

위르겐 힌츠페터와 김사복씨가 나란히 담긴 흑백사진 [김승필씨 제공]

김사복 씨가 갖는 의미는 한 개인의 특별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월 광주의 특수성을 서울 택시기사 김사복에게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힌츠페터와 김사복이 광주에 도착해서 처음 대하는 장면이 낯선 이방인에게 물과 주먹밥을 권하는 광주시민들의 모습이었다.

실제로 오월 광주는 그랬다. 저명가의 통솔이나 지휘 없이 각자가 알아서 리더가 되고, 다른 이들은 자연스럽게 동행이 되었다. 학생들이라고 해서 대학생들이 아니라 고등학생, 중학생도 있었고 그러다보니 엄마, 아버지도 있었다. 택시기사, 버스기사도 있었고, 구두닦이, 동네 건달도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학교에서 “국군장병 아저씨께”라는 위문편지를 쓰며 고마움과 미안함에 눈물 한 번쯤 흘려봤을 평범한, 지극히 소박한 시민들이었다.

김사복이 본 것들이 거의 그런 것들이지 않았는가. 오지랖인지 인정인지 혹은 영웅기질인지 중요치 않은 광주 택시기사들이 보인 목숨 건 의리는 결국 호텔 택시기사 김사복을 다시 광주로 돌아가게 하지 않았던가.

이쯤 되면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무너지고 만다. 아니 그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만약 김사복 기사를 찾지 못했더라면 몰라도, 그가 살다가 80년이 조금 지난 시기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마저도 드라마틱해서 픽션이고 뭐고 뭐가 중헌디 소리가 절로 나게 된다.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 이미지

한국 사람이라서 통제된 광주의 진실을 알린 독일기자의 공로보다 더 높이 사는 것이 아니라, 해방구 광주의 오월은 그랬기 때문에 김사복은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연인 것이다. 게다가 위르겐 힌츠페터는 그동안 혼자의 이름이었지만 그는 김사복과 함께여야 완성되는 이름이었다.

최근 숨겨진 광주의 참혹한 진실을 JTBC <뉴스룸>의 고독한 특종을 통해 접하고 있다. 지상군은 전쟁을 방불케 하는 무기와 실탄을 소비했고, 공군은 여러 곳에서 광주 폭격을 준비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몰랐으면 몰라도 찾지 못했다면 몰라도, 이제 알게 됐으니 광주의 의인, 광주의 은인을 한 명 더 갖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새로이 알게 된 것이 참혹한 사실뿐만 아닌 것이 또 얼마나 다행인가.

이는 광주는 더 많은 진실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실존인물 김사복을 뒤늦게 찾은 것 역시 광주가 찾아내야 할 진실이었다. 아니 현실이 되었어야 할 진실이 마침내 진실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우리의 영웅이자 우리의 흔한 이웃이었던 김사복 씨를 찾은 것이다.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 이미지

뒤늦게 김사복 씨의 아들 김승필 씨가 트위터에 선친의 존재를 알렸을 때의 글도 새삼 감동적이다. “저는 김사복씨의 큰아들입니다. 어제 저희 아들과 이 영화를 보고 늘 제 안에 계셨던 영웅이 밖으로 나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은 김사복이란 본명을 사용하시면서 당당히 사시다가 1984년 12월 19일 6개월의 투병 생활을 마치시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라는 전언에는 마치 그가 광주에서 보고 느낀 분노와 절망 때문에 그리 빨리 떠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고인도 세월이 흘러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의 영화를 보고, 눈물도 흘리고 또 고마워했다는 사실에 왠지 흐뭇해 할 것만 같다. 그를 생전에 그토록 만나보고 싶어 하던 위르겐 힌츠페터, 이번 발견을 계기로 망월동 묘역에 함께 안치될 방안이 추진된다니 또한 다행스럽다. 광주의 의인을 늦었지만 잘 대접해야 할 것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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