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용범 연출가가 제작한 <프랑켄슈타인>은 창작뮤지컬의 큰 줄기를 구축한 잘 빠진 뮤지컬로 평가된다. 왕용범 연출가에게 있어 이번 작품 <벤허>는 중요한 의미의 창작뮤지컬이었다. <프랑켄슈타인>의 성공이 우연히 아니었음을 이번 신작을 통해 증명해야 했고 <두 도시 이야기> 당시의 아픔을 이번 작품을 통해 극복해야 했기에 말이다.

결국 왕용범 연출가는 <벤허>를 통해 소포모어 징크스를 보기 좋게 떨칠 수 있었다. 개막 전 뮤지컬 팬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만족보다는 실망만 가득하던 <페스트>나 장진 감독의 <디셈버>, 김준수가 출연한 <도리안 그레이> 등 다수의 창작뮤지컬이 실패한 가운데서, 과연 창작뮤지컬로 도전하는 <벤허>가 성공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더군다나 이 작품은 제작이 한 번 불발된 작품이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왕용범 연출가는 이 의문을 보기 좋게 걷어찼다.

창작뮤지컬 <벤허> ⒸNCC

그렇다면 왕용범 연출가는 어떻게 <벤허>의 무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영화 속 장대한 스펙터클을 뮤지컬 무대로 옮기기가 불가능해 보였지만 <벤허>는 ‘선택과 집중’에 있어 영민한 전략을 택했다. 아무리 무대 세트를 정교하게 구현한다 해도 로마 총독의 행군을 구경하던 티르자가 실수로 기왓장을 떨어뜨리는 장면, 노예선 안에 갇힌 벤허의 육체적 고통 등 원작의 거대한 장면을 무대에서 온전히 구현하기란 무리수에 가까워 보였다.

왕용범 연출가는 이런 대규모 스펙터클이 필요한 장면을 과감하게 축소하는 ‘선택’을 하는 대신에, 원작 소설과 영화와는 다른 장면에 ‘집중’함으로 원작의 아우라를 망가뜨리는 우를 피할 수 있었다. 그의 ‘집중’은 무엇이었을까. 전작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이 언덕 위 아이에게 마음을 여는 듯하다가 무심히 아이를 밀치는 장면과 같은 ‘재해석’을, 이번 <벤허>에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집중했다.

왕용범 연출가가 재해석한 연출 가운데 몇 사례만 들어보겠다. 원작에서 빌라도는 그리 비중이 크지 않은 인물이지만 뮤지컬은 벤허의 원수인 메셀라와 빌라도를 유기적으로 강화하는 재해석을 가미했다.

창작뮤지컬 <벤허> ⒸNCC

메셀라가 벤허의 가문을 적대시한 이유도 뮤지컬은 원작보다 강화하고 있었다. 메셀라가 우정을 중요시하기보다 배신을 택한 이유는 단지 로마에 인정받고 싶은 인정욕구 때문이 아니라, 또 다른 사연이 메셀라 안에 있어 벤허 가문을 적대시하게 됐다. 뮤지컬은 이렇게 재해석을 통해 메셀라의 내면 심리를 강화하고 있었다.

캐릭터의 사연을 강화하고 재해석하는 ‘집중’을 통해 <벤허>는 뮤지컬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성공한 뮤지컬은 <레베카>와 <헤드윅>, <빌리 엘리어트>처럼 100% 재공연을 하기 마련이다. 만일 <벤허>가 재공연을 한다면 이런 점은 개선할 필요성이 있기에 단점을 언급하겠다.

맨 처음은 1막의 넘버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1막의 넘버 부족 현상은 대사가 빈약했던 뮤지컬 <미션>과 <보디가드>를 떠올리게 만든다. 연극 <워 호스>의 무대장치처럼 구체관절 말이라는 소품을 활용하기는 했지만 그 유명한 전차 경주의 긴박감은 다음 재연에서 극대화로 끌어올릴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빌라도의 “들이쉬고 내쉬고” 같은 아재개그는 관객에게 재미를 덧붙이기 위해 짜인 적절한 아재개그지만, “자네 궁둥이는 간밤에 안녕하세요?” 같은 무의미한 아재개그는 지양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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