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된다. “적폐청산”을 외치며 개혁을 향한 행보를 해온 문재인 정권의 스텝이 꼬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논란이 견고한 기득권 때문이 아니라 문재인 정권 스스로의 문제에서 비롯된 걸로 보인다는 점에서 이후 상황은 쉽지 않아 보인다.

현재 시점에서 가장 심각해보이는 것은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 문제다. 과학을 사실상 종교 논리로 대체하자는 창조과학의 신봉자라는 의혹을 받던 박성진 후보자는 과거 자신이 쓴 칼럼 등에 드러난 편향적인 역사관으로 다시 한 번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박성진 후보자는 지난달 31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잘 몰라서 그랬다”는 취지의 해명을 했는데,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에는 한참 모자란 수준이다.

이런 판국이니 문재인 정권이 장관 후보자로 지명한 인물을 조선일보가 감싸는 근래 보기 드문 일도 일어났다. 1일 조선일보는 2면에 박성진 후보자 기자회견 기사를 싣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본 罪>라는 제목을 달았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보자”는 것은 역사수정주의의 우익 버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뉴라이트의 캐치프레이즈인데, 결국 조선일보가 하려는 말의 핵심은 1948년 건국론 등 역사관을 이유로 박성진 후보자가 낙마하는 상황을 만들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1일치 2면 기사

조선일보의 논조는 고약한데가 있지만 절반 정도는 맞는 얘기다. 국무위원으로서 일반적 국가 현안을 다뤄야 하는 직책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중소기업벤처부 장관 후보자가 ‘뉴라이트 논란’으로 낙마하는 것에 대한 정치적 설명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등의 보수세력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문재인 정권과 이른바 ‘좌파’ 세력을 이념에 사로잡힌 정치꾼들 정도로 묘사할 것이다. 이른바 ‘진보’를 자처하는 자들은 자기 세를 불리는 데만 관심이 있고 경세(經世)에는 소홀한 통치 부적격자들이라는 프레임이다.

지금까지 문재인 정권의 주요 인사가 뒤집힌 사례는 대개 지지층이 흔들리는 상황과 연관됐다. 문재인 정권이 그만큼 지지층 내의 여론을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방선거를 10개월 남겨놓은 상태의 ‘개혁정부’ 입장에선 지지층의 동향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여당과 그 지지자들은 박성진 후보자의 기자회견에 대해 여전히 부정적 평가를 내놓고 있다. 박성진 후보자가 낙마하든 임명 강행 되든 문재인 정권은 정치적 내상을 피할 수 없다. 애초에 청와대 인사라인이 박성진 후보자가 쓴 칼럼 등을 면밀히 검토했더라면 이런 일은 미리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도대체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기독교를 포함한 보수 세력을 염두에 둔 포석의 결과로 보이지는 않는다. 언론을 통해 드러나는 청와대 관계자들의 반응은 애초에 창조과학이나 뉴라이트 역사관의 문제는 검증 대상조차 아니었다는 식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과연 이 ‘인사 사고’에서 인사수석과 민정수석 중 누구의 책임이 더 큰지를 따져 보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어쨌든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청와대의 인사검증시스템이 어떤 이유에서든 작동하지 않았다는 거다.

이쯤에서 사고실험을 해볼 필요가 있다. 가설은 인사수석이나 민정수석, 아니면 인사추천위원회가 위장전입이나 논문표절 등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들로만 대상을 최소화해 검증 작업을 진행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라면 검증이 우선이고 그 결과가 인사로 이어진 게 아니라 낙점이 먼저고 검증이 뒤를 이은 게 아니냐는 의심이 가능하다. 중소기업벤처부 장관에 어울릴만한 인사들이 모조리 지명을 고사하는 상황에서 시간에 쫓기다보니 부실검증이 이뤄졌다는 다소 ‘건전한’ 해석도 제기되지만 이것만으로는 사태가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정치권에서 ‘배후론’이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일각에선 박성진 후보자가 문미옥 청와대 과학기술보좌관과 포항공대 동기라는 점에 주목한다. 문미옥 보좌관의 ‘천거’를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고려한 결과 아니냐는 거다.

과학기술혁신본부장에 임명됐다 결국 자진사퇴한 박기영 교수 사례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나왔었다. 박기영 교수는 지난해 4월 총선에서 김종인 당시 비대위원장이 주도한 비례대표 후보자 명단에 당선권인 14위로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이후 김종인 비대위원장 안이 ‘셀프공천’ 등의 논란에 휩싸이며 수정되면서 박기영 교수의 비례대표 후보자 순위는 당선권에서 멀어졌다. 문미옥 보좌관은 5위로 당선안정권이었다. 말을 만들어 내길 좋아하는 여의도 호사가들이 ‘보은’, ‘배려’, ‘파워게임’ 등과 같은 단어를 꺼내들고 즐거워했음은 두말 하면 잔소리다.

박성진 초대 중소기업벤처부장관 후보자가 31일 오후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논란 해명 기자회견에서 질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시나리오’들에 과연 아무런 근거가 없겠는가. 과장된 측면이 있을지 몰라도 요직을 둘러싸고 여러 세력이 힘겨루기를 하는 양상일 수 있다는 건 여의도 정치의 상식으로 보자면 타당한 해석이다. 그러나 정권이 성공하려면 이런 일들은 어디까지나 주변적인 것이어야 하고 당위와 명분이 언제나 중심이 돼야 한다. 지금처럼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형국이 되면 문재인 정권의 통치는 생각지 못한 어려움에 빠질 수 있다.

문재인 정권의 인사를 둘러싼 문제는 초기 추미애 대표와 청와대의 대립설로 시작해서 안경환 전 법무부 장관 후보자, 조대엽 전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 낙마 등을 거쳐 눈덩이처럼 크기를 키우고 있다. 이런 상황은 왜 유독 문재인 대통령이 선호하는 걸로 알려진 인사에 거듭된 문제가 발생하느냐는 의문으로까지 이어진다. 더불어민주당을 중심으로 인사를 둘러싼 각 세력의 각축전이 문재인 대통령 본인의 통치력 유실로 귀결되는 국면이 올 수 있다는 이야기다.

현재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수행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70%를 넘는 긍정평가를 받고 있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국회에서는 비록 다수를 점하지 못하지만 국민적으로 50%를 넘는 지지율을 획득하고 있다. 그러나 선거를 앞두고 야당의 이런 저런 합종연횡이 가속화되고 현재 침묵하는 보수적 유권자들이 다시 제 목소리를 찾게 될 경우 문재인 정권의 압도적 우위는 허물어지는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다.

뻔한 수로 일관하다 모처럼 둔 노림수가 ‘악재’로 연결되는 건 지는 게임의 전형이다. 최근 문재인 정권의 행보는 인사와 정책 양쪽 면에서 불행하게도 지는 게임의 길로 가고 있다는 평가를 면키 어렵다. 벌어 놓은 점수가 워낙 커서 당분간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세상에 100년 가는 정권은 없다. 적어도 이 정부가 성공적으로 개혁을 완수하려면 지지율이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는 시점은 최대한 늦춰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청와대와 여당이 오만에 빠져 안이해진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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