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1심 판결은 진작부터 ‘세기의 재판’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정경유착의 가장 굵은 뿌리를 도려낸다는 의미에서 당연하며, 이 재판의 결과가 곧 박근혜·최순실 재판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는 언론계의 예상이기 때문에 중요함을 넘어 세기의 재판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이 결코 과장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다더니 세기의 재판은 흔한 재벌들의 재판의 수준에 머물렀다. 뇌물공여(433억원), 횡령(298억원). 재산국외도피(78억원), 범죄수익은닉, 국회위증 등 다섯 가지에 대해 일부 무죄가 있었어도 이 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면서도 정작 형량은 5년에 불과했다. 각 혐의의 최저 형량이었다. 특검의 구형도 낮지 않냐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다시 한국 사법부가 가난한 사람들의 가벼운 범죄 혹은 실수에 대해서 얼마나 가혹한 판결을 내렸는지, ‘라면 훔치고 몇 년’ 등의 사례들이 SNS에 떠돌았다. 냉소와 분노가 뒤섞인 말들은 사법부는 변하지 않았다는 자조로 마침표를 찍었다. “한국에서는 대형 범죄일수록 처벌받지 않는다”는 식의 말이다.

2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법정을 나서 호송차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언론들은 뇌물공여가 유죄로 인정되어 박근혜·최순실 재판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의미를 애써 강조하고 있지만 그 역시 담보된 결과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1심 형량의 문제점을 호도하는 것이라는 경계가 마땅하다. 설혹 영향을 주더라도 이런 판결은 ‘정권 위에 삼성’이라는 흉흉한 풍문을 확인시켜 주는 정도일 뿐이다. 유죄 판결을 내렸지만 형량으로 봐서는 유죄라고 하기도 어려운 수준이며, 2심으로 가 집행유예를 석방하기에 딱 좋은 수준이라는 의심이 팽배하다.

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25일 저녁 <CBS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양형을 높일 수 있는 요소들, 그리고 특히 꼭 인정돼야 된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에 대해서 무죄가 선고되면서 양형 자체가 약하게 나왔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 2심에서의 집행유예의 빌미를 남겨둔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았다.

물론 한명숙 전 총리의 재판처럼 1심의 무죄가 2심에 가서 유죄 판결이 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보통의 경우라면 1심 형량보다 2심에서 줄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1심 형량 5년이 2심에서 3년 징역, 5년 집행유예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판결이었다. 그런 한편 1심 판결이 2심의 복선이라는 말도 나온다.

특히 판결 내용 중 “수동적 뇌물 공여”라는 표현이 심상치 않다. 쉽게 표현하자면 “마지못해 뇌물을 제공했다”는 정도로 풀어볼 수 있다. 이럴 경우 ‘뇌물'과 '마지못해 제공했다' 중에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가 관건이라 할 것이다. 해석과 선택의 여지를 남긴 것이다. 이 '수동적 뇌물공여'가 대부분의 언론에서 해석하는 것처럼 박근혜의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 유죄를 보장하는 보증수표는 아닌 것이다.

양형 이유를 설명하며 “이 사건의 본질은 정치와 자본 권력의 밀착”이라고 규정한 재판부의 논리에 스스로 모순을 더한 셈이다. 재판부는 “이 사건을 보면서 국민은 박근혜의 공정성 청렴성에 대해 의문. 삼성 도덕성에 대해서도 불신. 박근혜와 대규모 기업집단이 관련된 정경유착이라는 병폐가 현재진행형이라는 신뢰감 상실은 회복하기 쉽지 않다”는 명징한 판결 이유를 남겼다. 그러고도 일부 무죄에서의 논리 모순이나 5년의 가벼운 형량을 선고한 것은 언행불일치나 다름없어 보인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 Ⓒ연합뉴스

한편 이번 재판의 선고형량을 앞서 예상한 사람과 책이 또 화제다. 이정렬 전 판사는 며칠 전 트위터를 통해 이재용 재판 선고형량을 5년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또한 더불어민주당 손혜원 의원과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사장 공저인 <경제, 알아야 바꾼다>에도 이재용 재판을 꼭 집어 말한 것은 아니지만 재벌 총수 재판을 언급하면 1심부터 3심까지의 전개를 5년, 3년 그리고 집행유예라면서 사법부를 비꼬았다. 이렇게 쉽게 맞출 수 있었던 '세기의 재판' 결과, 그저 우연이었을까?

박주민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재벌들에 대한 소위 ‘3·5법칙’을 방지하기 위한 법안을 발의한 사실을 전했다. 이 법안은 재산 이득액이 50억 원 이상이 되는 횡령이나 배임 등의 경우 7년 이상 징역형에 처하게 하는 내용이다. 무한도전으로 얻은 ‘박발의’답게 필요한 법안은 정말 촘촘하게 발의해놓은 박 의원이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통과에 있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