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해야 할까. 보수정권이 완전히 망가뜨린 공영방송을 바로잡으려는 언론노동자들의 노력이 계속되는 요즘이다. MBC의 경우 제작거부와 사측의 노동탄압 폭로가 이어진 끝에 24일부터 언론노조 MBC본부의 총파업 찬반투표가 시작됐고 KBS에서도 고대영 사장 사퇴를 촉구하는 제작거부 움직임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이런 흐름의 확산은 YTN과 연합뉴스에도 이어질 전망이다.

그간 보수정치에 정파적 충성을 바쳐오다 반(反)개혁의 최전선에 서게 된 MBC 수뇌부는 당연하게도 호락호락 넘어갈 분위기가 아니다. 김장겸 사장이 ‘퇴진 불가’를 공개적으로 밝히는가 하면 보도국장이 파업 참가자에 대한 탄압과 불참자에 대한 인사상의 배려(?)를 노골적으로 예고하는 문자를 보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전쟁’을 앞두고 최소한의 체면과 염치는 포기한지 오래라는 듯한 태도이다.

언론노동자들의 현실적 최대 우군은 문재인 정권이다. 대통령이 직접 공영방송 문제를 직접 수차례 언급했고 고용노동부가 특별근로감독에 나섰으며 방송통신위원회도 모종의 조치에 나설 태세이다. MBC와 부적절한 동맹을 이뤘던 자유한국당은 이 점을 들어 ‘방송장악’ 프레임을 재생산하고 있다. 권력이 공영방송을 길들여 자기들에 유리한대로 써먹기 위해 ‘언론개혁’이라는 핑계를 동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결말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현대적 비난의 만능 논리이다. 똥 묻은 개끼리 명분 찾지 말고 그냥 서로 똥 묻히며 살자는 거다.

보수정치가 통치에 대한 냉소적 인식을 갖고 있다는 건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다. 보수정권에서 국정원을 어떻게 활용하였는지를 보면 답이 나온다. 정권의 지지자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해 여론조작에 동원하기 위해 ‘눈먼 돈’을 뿌려댔다는 심증은 더 이상 ‘의혹’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 수법이 너무나 저열하고 천박해 보는 사람이 창피해질 정도다. 보수정권의 국정원이 이런 정파적 활동을 더 노골적으로 하기 위해 내부 단속에 나섰던 게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분쟁 예방 비영리기구인 국제위기그룹(ICG)의 2014년 8월 보고서에 원세훈 원장 시절 국정원의 사기가 떨어져 약 10명의 요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록이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보수정권에서 공영방송 MBC의 처지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정치 사회 이슈를 다루면 정권 비판을 안 할 수 없으니 동물이나 날씨와 같은 주변적 주제를 다루는 리포트를 대폭 늘렸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선 아예 권력과 한 몸이 되는 길을 택해 ‘애국언론’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비극을 막기 위해 목소리를 낸 언론인들은 탄압하고 내쫓았다. 이런 행태를 비판하는 노조와 외부 단체 등엔 ‘보도’로 치졸한 보복을 했다.

이들의 눈에는 세월호 참사도 권력을 함정에 빠지도록 한 정치적 장애물일 뿐이었다. 참사가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점에서 당시 보도국장이던 김장겸 사장이 ‘깡패’라는 용어까지 동원해 유가족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벌인 것은 이 때문이다. 이들이 가진 단 하나의 기준은 정권과 한 배를 탄 자신들의 기득권이 유지되는데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거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이 무너뜨린 것은 ‘저널리즘’ 그 자체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공영방송을 정상화한다는 것은 ‘저널리즘’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 가치를 다시 세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예를 들자면 김장겸 사장과 그 일당들이 물러나는 것으로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방송장악”이라는 황당한 소리를 하는 보수세력에게 우리의 저널리즘이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말을 꺼내기엔 다소 이른 시점으로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굳이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될 것이다.

정상화 된 공영방송이 구해야 할 첫 번째는 공정성이다. 여기서 공정하다는 것은 여당 소식을 10분 다뤘으니 야당 소식을 적어도 8분은 다뤄야 한다는 식의 기계적 균형과 중립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보도의 결과가 편파적이더라도 그러한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공정해야 한다. 실체적 공정성은 저널리즘의 결론이 누구에게 정파적 이득을 안기는지와 관계없이 사건 그 자체를 신실하게 다룬 결과로서만 보장될 수 있다. 즉, 정상화된 공영방송의 저널리즘은 누구의 정치적 유불리가 아니라 사건 그 자체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거듭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는 공공성의 강화이다. 저널리즘이 복무하는 것은 오로지 공적 가치의 추구여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의 보도가 회사의 이해득실이나 언론인 본인의 사적 이해관계의 반영으로 구성되어서는 안 된다. 광고주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기사나 시청률이나 조회 수의 증대만을 노린 리포트의 생산은 중단해야 한다. 언론 일반의 기득권이 보장되느냐를 기준으로 정부 정책에 대한 논조를 결정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예를 들면 김영란법이다. 이 법의 완결성에 대한 논란과는 별개로 일부 언론의 태도는 “왜 공무원도 아닌 우리에게 그러느냐”란 것 이상이 되지 못했다.

셋째는 다양성의 인정이다. 새로운 시대의 언론은 각자가 상호 호혜적이어야 한다. 명사가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나 특정 의원실이 보도자료로 배포한 것을 ‘단독’이라는 이름을 붙여 먼저 보도하는 것에 목을 매는 미련한 일은 멈추어야 한다. 누구나 언론을 자처할 수 있고 사방에서 다양한 정보가 무차별적으로 유통되는 뉴미디어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시도를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조성된 언론 생태계에서 기성언론은 속보가 아니라 검증된 팩트를 깊이 있는 관점으로 전하는, 가장 우선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매체의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할 마지막 퍼즐은 미디어 상호 비평 시대의 부활이다. 각 매체가 공공성, 공정성, 다양성의 틀 안에서 서로를 비평할 수 없다면 저널리즘 본령의 수호는 가능하지 않다. ‘비판정신’을 부담스러워한 KBS가 지난해 4월 <미디어 인사이드>를 없애면서 공영방송에서 상호 미디어 비평의 역사는 명맥이 완전히 끊겼다. 이런 세태는 언론 스스로의 질적저하와 보도 및 취재에서의 공정성 공공성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흐름을 다시 되돌려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손석희 JTBC 보도부문 사장의 MBC 시절을 <100분 토론>과 <손석희의 시선집중>으로 기억하지만 그가 가장 빛난 것은 <미디어비평>의 초대 진행자를 맡았던 때였는지도 모른다. ‘매체비평’을 걸고 탄생했고 지금은 ‘매체지’를 자처하는 언론도 이번 기회를 맞아 신발끈을 다시 맬 필요가 있다. 한가한 회고에 젖어 보자는 것은 아니다. 공영방송 정상화를 위한 투쟁을 잊혀진 꿈을 다시 꾸는 기회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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