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아닌 ‘독재’ 논쟁이 한창이다. 조중동을 영토로 삼는 헛나이 자신 철부지들은 ‘독재’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독재’가 아니라는 증거라는 희한한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면서 ‘진짜 독재가 뭔지 맛을 좀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는 협박을 던지고 있다. 정말 ‘독재’는 그 표현을 공공연히 사용할 수 있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를 분기점으로 구분, 형성되는 것일까? 물론, 아닐 게다. 다만 그들의 주장처럼 표현의 사용 여부를 포함한 일련의 정도들을 두고 과거의 강고한 독재와 오늘의 연성화된 독재의 차이들을 설명할 순 있을 것이다. 단, 그렇다고 변비나 설사나 본질이 ‘똥’이라는 것이 달라지지는 않지만.독재는 정치적인 영역, 공적 표현의 장을 기준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지적하듯, 몇 개의 정치적
자신의 차를 들이받은 운전자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당연히 승소할 줄 알았던 의뢰인, 재판에서 ‘깨끗이’ 패배하자 변호인에게 분통을 터뜨리며 법률 회사를 힐난한다. 심지어 자신의 전화에 왜 회답을 늦게 주었냐고 따져 묻기까지 한다. 그러다 불쑥 이런 말을 꺼낸다. “내 말 좀 들어봐요. 당신은 그런 일을 잘할 사람을 곁에 둬야 해요. 전화 받는 비서로 날 채용하면 어떻겠어요?” 처음엔 안 된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던 변호사, 끝내 간청을 뿌리치지 못해 동료 변호사와 함께 상의해 보자고 한다. 하지만, 동료 변호사의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모욕적이다. “그녀를 고용해서 뭘 하려고? 혼자 멍하니 앉아 있는 것 말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 것 같은가?” 하지만, 두 변호사는 ‘입 크고 가슴 큰 병아리’ 같은
교감은 동정이 아니라 감정의 수위맞춤이다*스포일러 조금 있음우리는 대부분 착한 사람이 되길 원한다. 아니, 다수의 편에 서길 원한다. 다수가 개인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착하다’는 소리를 듣길 갈망한다.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인정받는 이들의 무리는 늘 서로를 다독이고 개인을 ‘착한 사람’으로 형상화해간다. 반면 ‘나쁜 사람’은 늘 소수다. 나쁜 사람은 개별적 욕망에만 충실할 뿐이다. 다수의 인정은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자기 주변에 밀착돼있는 소수에게만 인정받으면 그만이다. 때로는 그 주변마저 배척하고 극단적으로 홀로서기도 한다. 다수는, 그런 개인을 ‘나쁜 사람’이라고 매도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말을 듣지 않는 꼴통’이 된다
이달 초 일명 ‘청담동 클럽 사진’이 나돌면서 또 다시 ‘퇴폐’나 ‘문란’ 같은 용어들이 남발되고 있다. 이 사건을 전후로 해서 대마를 접한 몇몇 연예인들이 언론에 보도되었고, 소위 말하는 문화예술 혹은 그 종사자들이 아니꼬운 시선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툭 까놓고 말해서, 남이야 클럽에 가서 뭘하고 어떻게 놀든 무슨 상관인가? 대마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누군가의 사회적 삶을 송두리째 앗아갈 만큼 해로운 것이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담배가 대마보다 중독성이 더 강하고 그 폐해도 심하다. 오랜 세월동안 인류 문명 발전에 기여했던 대마가 불법화된 것은 미국 헤게모니의 영향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대마가 불법화된 것도 듀퐁과 같은 석유자본이나 인종차별주의, 메카시 열풍 등의 정치경제적 배경 때문
“봉사하러 간 거면 애도가 맞는데, 선교하러 간 거면 죽어도 할 말 없다.” 고 엄용선씨 사망 기사에 올라온 댓글입니다. 비판하는 분들의 초점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알려진 것처럼 엄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입니다. 비기독교국가에 자원봉사하러 갔다면 선교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입니다. 2007년, 저는 샘물교회 피랍사건과 관련한 취재를 했습니다. 기사는 총 세 개를 썼는데, 첫째는 아프간피랍사태와 관련한 언론보도 태도에 대해 네티즌의 비판을 어떻게 볼 것인가였고, 둘째는 그렇다면 비난이 집중되고 있는 박은조 목사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셋째 기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한민족복지재단 의료봉사팀’과 ‘샘물교회 단기선교팀’ 사이의 간극문제를 다뤘습니다. 세 기사에 대한 네티즌 반응은
칼럼 쓰는 입장에서, 제일 괴로울 때가 하나의 소재가 하나의 글로 완결적으로 구성되지 않을 때이다. 요 며칠이 그랬다. 쉴 새 없이 일이 벌어지긴 하는데, 밤하늘 은하수처럼 작렬하는 블로거들의 빛나는 글들 사이에서 고뇌하다, 변별점을 갖춘 그럴싸한 글을 만드는데 계속, 실패했다. 쓰다 말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너무 덩치가 큰 고민이었다. 어제 오늘, ‘민주주의’를 키워드로 하는 몇 개의 사건이 우연히 나란한 시계열로 배치됐다. 민주주의를 염려한 DJ의 ‘독설’을 지지하는 여론이 50%를 상회한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고, 네티즌들에 의해 오바마발 ‘시국선언’이라 명명된, 저 멀리 이란의 민주주의에 대한 오바마의 연설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자 조선일보는 ‘한국에 꼭 맞는 민주주의란 있는가’라는 박효종 서
2010년부터 우리 국민들은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서 지문날인 검사를 받아야 한다. 지난 4월 국회에서 전자여권에서 지문을 삭제하도록 하는 법안이 발의되었지만, 외교통상부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여권에서 지문을 삭제하되 여권발급시 지문찍기를 통한 본인확인은 진행하는 내용으로 법안이 수정가결되었다. 이러한 제도는 17세가 되면 동사무소나 학교에서 공무원의 손에 붙잡혀 십지지문 강제날인을 당하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에 기반하고 있다. 전자여권의 국제표준 어디를 봐도 여권발급시 지문찍기를 통한 본인확인을 진행해야 한다는 규정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국내법조차도 국가기관이 본인확인을 하고자 할 때는 신분증을 이용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결국 전 세계 그 누구도 시행하고 있지 않은 불필요하고 불쾌한 신체검사가 우리
6월 13일 선거 결과가 발표된 후, 이란은 폭풍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렸다. 그 시위를 보고 있노라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나를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은, 현 정부의 임기가 3년 반 넘게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대선을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란의 이번 대선은 분명히 ‘합법적’이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보통, 비밀, 평등의 원칙이 지켜지는 가운데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 유세 과정에서 개혁파 후보인 미르 호세인 무사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밝은 녹색을 상징으로 삼아 축제처럼 선거운동을 진행해 나갔다. 테헤란의 광장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지지 집회는 외신 기자들의 카메라를 붙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아랍권을 순방하는 오바마 미 대통령의 은밀한 지원 사격도 눈에 띄었다. 바야흐로 이란에도 변화의 물결이 당도하
KBS 보도에 대한 질타가 안팎에서 쏟아지고 있다. 이병순 사장 취임 이후 변질된 KBS의 보도를 비판하는 시민사회의 목소리는 이미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KBS에 대한 ‘민심’을 정확하게 확인해 준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기간이었다. KBS 내부에서까지 KBS 보도의 문제를 지적하기 시작했다. 지난 4일 KBS기자협회에서 발행한 기자협회보에서는 등의 기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취재 당시 KBS 기자들이 봉하마을 빈소에서 쫓겨나고, 취재현장 곳곳에서 시민들의 항의와 취재거부 등을 당했고, KBS 로고를 가리고 취재하는 수모를 겪었다고 전했다. 또 지난 8~9일 KBS기자협회는 신임투표를 실시했는데 각각 82.2%와 93.5%의 기자들이 김종률 보도본부
지난 5월 13일 방송통신위원회는 ‘2009년도 시청자권익증진활동 지원사업’에 선정된 단체들을 발표하였다. 결과는 오랫동안 시청자권익보호 활동을 수행해 온 단체들은 탈락하고 관련 활동분야에서 듣도 보도 못한 단체들이 대부분 선정되었다. 시청자운동 단체들을 탈락시킨 것은 ‘경찰청이 이들을 불법폭력단체’로 정해 통보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여러 매체를 통해 보도되었다. 오랫동안 시청자권익보호 활동을 해 온 단체들이 배제된 이유가 불법폭력단체이기 때문이라니 기가 막힐 일이다. 시청자권익증진=경험과 역량 있는 단체 배제하는 데서 출발? 시청자권익증진활동 지원사업은 애초 ‘시청자단체 활동 지원’을 목적으로 2000년 통합방송법 개정 시 방송발전기금의 용도에 ‘시청자단체 및 미디어교육 지원’이 명시되면
조중동의 복수극이 다시, 시작되었다. 잔혹한 일이다.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몰고도 포기할 수 없는 적개심이라면, 기본적인 품성을 의심하는 것밖엔 도리가 없다. 예정된 수순대로, 이번엔 DJ를 향한 활극을 시작했다. 서거 국면으로 잠시 숨을 고르는 척 하던 조중동이 가파르게 DJ를 조여가고 있다. 노무현을 겁박할 때와 같은 거침없는 활극 모드는 아니지만, 그와 그로 상징되는 정치적 세력의 숨통을 노리고 있다는 점에서 목적은 같다. 오늘 중앙일보 이훈범 칼럼은 DJ를 조이는 세력의 내면과 그 논법의 전형을 보여준다. 게다가 노무현을 잃은 슬픔이 자신들을 향한 분노로 치달을까 노심초사했던 순간의 고뇌까지 마음에 담고 있어, 한층 교묘해진 수법을 선보인다. 찬찬히 읽어보자.우선, 그 칼럼의
농민들이 경찰의 곤봉세례를 받아가면서 쌀시장 개방을 반대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값싼 외국산에 밀려 쌀 생산기반은 붕괴되고 주식마저 석유처럼 해외공급에 의존하는 사태가 일어났을 것이다. 가뭄, 홍수 등 세계적인 기상이변이 일어나면 흉작으로 인한 가격폭등이 그대로 국민생활을 강타한다. 바로 2년전 세계적 식량위기로 22개국에서 민중폭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한국은 쌀만은 자급체제를 유지해 식량파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93년 12월 우루과이 라운드가 타결되면서 쌀시장도 MMA(최소시장접근)에 의해 열렸다. 수입물량을 10년간 단계적으로 늘려 소비수요의 4%까지 개방했던 것이다. 이 물량은 소비와는 상관없이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한다. 당시 국내 쌀값이 국제시세에 비해 4~5배가량 비쌌다. 그 때문에
※스포일러 많습니다. 매일 아침 포털 사이트에서 뉴스를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왼손은 턱에 괴고 오른손은 클릭질하는 자세로 심드렁하게 창을 연다. 정치뉴스엔 별다른 관심을 쏟지 않고 곧 신경줄을 놓는다. 대체로 분노할 힘도 없이 썩소만 짓게 되기 때문이다. 경제뉴스에선 잘 알지도 못하는 숫자 놀음에 수십조 원이 요동친다. 클릭하면 그저 스스로가 얼마나 비경제적인, 그래서 2009년 대한민국 사회에선 얼마나 무식하기 짝이 없는 동물로 규정되는지 확인하는 거울 같아 슬쩍 외면한다. 물론 냉소와 외면만 있는 건 아니다. 각종 연예 뉴스에 검지가 빠르게 경련하기도 한다. 이런 뉴스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사람들의 클릭질을 ‘낚기만’ 원할 뿐이야, 혹은 ‘…’로 끝맺는 제목을 남발하며 말초적인 궁금증을 유발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역사의 심판을 약속했습니다. 대통령 각하, 우리는 당신을 역사의 심판에 넘깁니다. 역사는 당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해줄 것입니다.” 프랑스의 지성 에밀 졸라가 지에 보낸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의 한 대목입니다. 이보다 3년 앞서,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 재판의 실상을 폭로하는 ‘나는 고발한다’를 이 신문에 실었습니다. 올해 2월, 제가 몸 담고 있는 잡지에서는 ‘나는 고발한다’는 제목의 커버스토리를 진행했습니다. 아이디어는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가 주셨습니다. 조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보나 보수 입장을 떠나, 공법학을 전공하는 입장으로 봤을 때도 현재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보면 법의 근본적 원칙이나 가치와 어긋난다는 생각이 든다.” 법학뿐 아닙니다. 인수위
진보블로그(http://blog.jinbo.net)의 어떤 블로거는 6·10을 가리켜 ‘이명박의 선물’이란 표현을 썼다. 아이러니하지만, 진보블로그의 감수성에서 가장 멀리 있을 조선일보의 강찬석 주필 역시 비슷하게 봤다. 그는 “6월 10일 서울광장을 메운 군중의 절반은 이명박 정권 1년4개월 세월이 불러 모았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썼다. 언론연대 양문석 사무총장은 이번 선물의 의미, 그러니까 ‘정세균 대표를 향한 시민들의 환호’를 민주당 지도부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 어찌되었건 그렇게 6·10은 끝났다. 그러곤 곧장 아주 재미난 그러나 충분히 예측 가능했던 상황들이 생각보다 훨씬 거칠고 매섭게 전개되고 있다.올해 6·10은 광장이 열릴 것이냐 말 것이냐가 다른 모든 이슈를 압도하는
대전의 한 초등학교 야구부에서 구타사건이 발생했다. 야구부 코치가 어린 아이들을 야구방망이로 때린 것이었다. 때린 이유는 간단했다. 전지훈련 가서 했던 연습시합에서 ‘졌기’ 때문이었다. 그 벌로 선수들은 그날 밤 숙소 밖으로 불려나와 주전선수는 20대, 비(非)주전선수는 일곱 대 가량을 맞았다고 한다. 그 중 여섯 명이 학교를 그만두고 전학을 가야 했고, 두 명은 정신과 치료까지 받고 있다고 하는데, 이제 갓 12살 쯤 된 초등학생들을 야구방망이로 이렇게 무자비하게 때린 사람. 그 정신상태가 궁금할 뿐이다. 언뜻 보면, 이 사건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때린 ‘지도자’이다. 물론, 맞다. 일단은 때린 놈이 1차 책임을 가진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운동부 내부에서의 지도자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침묵하
최근 노사협의회를 통해서 알려진 사내 연봉계약직 420여명에 대한 회사의 방침이 큰 파문을 낳고 있다.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비정규보호법의 적용 시점을 맞아 KBS는 법의 기본 취지인 ‘2년 이상 근로시 정규직으로의 전환의무’를 피하고자 계약해지와 자회사 이관을 7월1일부터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다.들리는 바로는 고령자보호법과 특수전문직 조항에 따라 법적용에서 배제되는 30명에 대해서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고 특수영상 및 수신서비스, 영상편집, 시설관리 등에 종사하는 120명에 대해서는 자회사 이관, 나머지 270여명은 계약해지할 방침이라 한다.이러한 방침이 회사의 의지대로 시행된다면 짧게는 4~5년, 길게는 십수년 이상을 KBS에서 근무한 이들 중 다수는 졸지에 일터에서 쫓겨나 생
“이명박 대통령은 독선적인 국정운영의 잘못을 인정하라”, “청와대의 일방통행이 민심이반의 핵심이다.”, “청와대에서 당을 바보로 알고 있다.” “정당정치와 의회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비민주적 행태를 개선하라.”, “기득권만 보호하려 말고 서민을 위한 정책을 펴라.”, “국민이 헌법에 보장된 저항권을 행사하는 심각한 상황이다.” 이 말, 말, 말은 야당이나 시민·사회단체가 아닌 지난 4일 한나라당 국회의원 연찬회에서 토해낸 말이다. 권부를 겨냥한 격한 말이 귀를 의심케 한다. 국민의 대표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납작 엎드려 청와대 눈치나 보는 그들이었기 하는 말이다. 작심한 듯한 역린(逆鱗)의 소리가 시국의 중차대성을 말하고도 남는다. 이명박 정부에는 국민이 없다. 오직 독선과 독주만 있
3주 전이다. 별세한 고 여운계씨의 기사를 쓰기 위해 토요일 아침 단잠을 깼다. 1976년 일간지의 한 귀퉁이에서 ‘할머니 역할이 잘 어울리는 배우 3위 여운계’라는 대목을 찾았다. 한 인터뷰에서 “나는 20대때부터 할머니가 잘 어울린다는 얘길 들었다”는 문구도 오렸다.우리 방송 역사의 산증인으로 현역배우인 그가 남긴 족적은 깊고 컸다. 기획사의 철저한 관리 속에 배우가 돼 가는 현재와는 달리 그가 맡은 역할은 하나같이 독특한 위치를 점했다. 그가 택한 마지막 드라마에서의 역할은 할머니였다(한국방송 ). 5년차 겨우 걸음마 뗀 기자가 얼굴을 내밀며 칼럼을 써보겠다고 용을 쓰던 그날, 무심코 켜 둔 라디오에서 속보가 타전됐다. ‘노, 사망, 보입니다’정도가 들렸다. 내 귀는 인터넷으로 관람 중